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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9.18 -
  2. 2009.05.27 꿈의 경계 3
  3. 2009.05.15 꿈의 비밀
  4. 2009.05.09 열락의 꿈 4
  5. 2009.04.12 마음에 들었던 글들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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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009. 9. 18. 18:41












 A는 연필을 들었다. 무언가를 쓰겠다고 정해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다. 실타래같이 엉킨 상념들을 풀어내기 전까지는 엉킨 그대로 존재할 것이었다. 나는. A는 두 글자를 적었다. 나는 너무도 힘겹다. 다시 적었다. 아니, 나는 힘든 것일까? 잘 모르겠다. 엉킨 실타래는 좀처럼 풀릴 기미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또 다시 한 문장을 끌어냈다. 내가 정말 힘들기 때문에 힘들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아니면 힘들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단지 그렇다고 적고 있을 뿐인 건가. 이번에는 한 문장을 더 써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화다운 화를 내 본 적이 언제의 일이던가. 조금 더 써 보기로 했다. 나는 무감각해졌다. 내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 내가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한다고 학습해왔기 때문에 이름 없는 기분에 억지로 이름표를 붙인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나는 지금 모든 게 지긋지긋하다. 이렇게 지긋지긋하다고 쓰고 있는 내 자신마저 지긋지긋하다.




 분명히 내게도 기분을 소리 내어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말하지 않는다. 왜 말하지 않게 되었는지는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다. 말하지 않음으로서 나는 느끼지 않게 되었고 무언가를 느끼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고 또 찾았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서도 만족하지 못했다. 분명 나는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데 모두들 내가 모든 것을 가졌다고 했다. 아마도 나는 내가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에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원한다.
 배부른 소리라는 주변의 말들이 너무나 증오스럽다. 나는 이미 많이 가졌으니 내 불만은 배부른 자의 헛소리가 되고 사치가 되어 내게 돌아온다.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는다. 나는 사랑받고 있지만 애정에 허덕이고 남들에 비해 풍족하지만 여전히 빈곤하다.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배부른 소리라는 그들의 말에 동의해 버린다. 내 스스로 나의 입을 틀어막는다. 그래서 나는 쓴다. 외칠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내보일 수 없기에 쓴다. 그저 쓴다.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대상에 대해 갈구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너희들이 보기에 나의 고통은 행복에 겨운 것이고 하잘 것 없어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것 역시도 고통이다. 내 고통을 너희들이 대신 살아주지도 않을 거면서 나의 고통을 경시하지 마라. 나는 숨이 막힌다. 숨이 막혀 허덕이고 있는데 남들보다 나으니 참으라는 말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 고통이 너희의 것보다 작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는가.





 A는 거기까지 쓰고 연필을 내려놓았다. 처음의 정갈했던 글씨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거칠어지고 흐트러져 있었다. 숨을 몰아쉬며 A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자신은 틀린 말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자신이 한 말이 틀렸다는 사실 역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A는 다시 연필을 들었다. 이제는 자기 손으로 자신을 깨부숴야 할 때였다. 그러나. 세 글자를 다시 적었다. 그러나, 나는 배워왔다.






 그러나 나는 배워왔다. 내가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고 배워왔다. 가슴은 피를 토하며 힘들다고 울부짖어도 머리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안다는 것은 내게는 고통이다. 내 맘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쇠사슬이 배움이다. 머리와 가슴은 멀어진다. 나를 질책하기만 하고 차갑고 냉정하게 판단하기만 하는 것은 머리고 이성이다. 사회 역시 그 잣대로 나를 판단한다. 나는 이 쇠사슬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완벽하게 혼자가 되어 이 세상에 나 홀로 남기 전까지 나는 머리의 지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말하지 못하고 쓸 뿐이다. 울지 못하고 그저 무감각해질 뿐이다.
 내가 가지지 않았더라면 배움과 세상은 내 고통을 연민했을까. 마음대로 목 놓아 울어도 됐을까. 그런 것이 소유의 대가라면 없어도 좋다. 하지만 나는 내 소유를 버릴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이 풍족함 속에서 태어나 자랐고 가진 상태로 태어났다. 내게 있어 소유란 나 자신이다. 나는 나 자신을 버리지 못한다.





 뚝. 연필심이 부러졌다. A는 연필을 내던졌다. 실타래를 풀어내 보았지만 남은 것은 조각난 실의 잔해들뿐이었다. 손 안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Posted by 달달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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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경계

Text 2009. 5. 27. 18:03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렸다고 하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최승현도, 나도 미쳐있는 게 분명해. 지용은 펼쳐진 연습장에 이런저런 단어를 써 보다 펜으로 마구 지워 버렸다. 그날부터 무언가가 이상하게 어긋나기 시작했다. 아니, 이미 그 전부터 어긋나기 시작했었을런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 균열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은 희끄무레하게 밝아오던 아침, 교실에서의 대면이 있고 나서부터였다.
 공부가 손에 잡힐 리 없었다. 같은 페이지, 같은 문장만 벌써 몇 번을 읽고 있는 건지. 요 일주일간 최승현은 매일같이 학교에 나오고 있었다. 와서 하는 일이라고는 뒷자리에 앉아서 지용의 뒷통수를 노려보는 일 뿐이었지만. 그리고 지용은 그 일주일동안 꿈을 꾸지 않았다. 꾸지 않는 건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알 도리는 없었지만 일어나고 나서도 기억은 없었다.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것으로 지용은 안심했다. 학교에서도 필사적으로 피하고야 있었지만 꿈에서 만나버린다면 그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야, 너 최승현이랑 뭔 일 있었냐? 내가 등이 다 따가워."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아 그래도 저새낀 괜히 누구 잡아다 족치고 그런건 안한다고는 하는데- 눈빛이 존나 살벌해. 진짜 아무 일 없었어?"
 "내가, 쟤랑 말 한마디 한 적이 있어?"
 "쩝.......뭐 그건 아니다만."

 

 왜 하필 최승현이었을까. 몇 번의 꿈으로 자신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제는 그 사실에 납득하고 있지만- 그렇다면 나는 최승현을 좋아하는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해 본 지용은 황급히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웃기는 소리. 분명 최승현은 봐줄만한 외모를 가지고 있을 지는 몰라도, 생각보다 괜찮은 놈일지는 몰라도, 그 이상은 아니었다. 겉으로 웃으며 대할 수는 있지만 속으로는 한없이 한심하다고 생각해왔던 부류에 속하는 녀석이다.
 왜였을까. 그것은, 나의 꿈이었을까? 불려온 것은 그일까, 나일까.

 고개를 슬쩍 돌려 뒤를 바라봤다. 여지없이 눈이 마주쳤다. 척추를 따라 쾌감을 닮은 서늘한 감각이 내달렸다. 무엇에 놀라기라도 한 듯 지용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가장 마지막으로 꿨던 그 꿈의 눈과  지독히도 닮아 있었다. 그 눈에 전부 보여졌고, 범해졌었다. 낙인이라도 찍은 것 처럼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버린 그 꿈이 잠시 눈을 마주친 것 만으로도 스멀스멀 떠오르기 시작했다. 울면서 그만두라고 해도 끈질기게 따라붙던 손.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몰아쳐져 쥐어짜내지듯이 몇 번이고 사정하고 사정했다. 순식간에 끄집어내진 꿈의 잔영은, 견고한 이성을 하나하나 부수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지키려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뭐가 그렇게 두려운 것일까.

 


 그 뒤로는 지용은 등 뒤에 꽂히는 시선을 느끼면서도, 그 시선에 묘하게 반응하고 있는 자신을 알면서도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오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만큼- 권지용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

 

 

 "젠장. 안나와?!"
 


 애꿎은 벽을 주먹으로 내리쳐 봤지만 손만 아플 뿐이었다. 일주일째였다. 여태까지는 문을 열면 지용이 침대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일주일 째 문을 열어도 보이는 건 텅 빈 침대뿐이었다. 첫날은 좀 늦는건가- 하고선 기다리고 있었다. 둘째날은 엇갈리기라도 한건가 싶어 기다렸다. 하지만 일주일째였다. 어떤 수를 쓴 건지 몰라도 권지용은 의도적으로 자신을 피하고 있었다. 이제는 도저히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가 없었다. 벌떡 일어난 승현은 문을 열고 복도로 뛰쳐 나갔다. 길게 이어진 복도를 따라 수없이 많은 문이 있었다. 하나하나 다 열어서 뒤엎는 한이 있더라도, 찾아내겠어. 내 앞에 끄집어 낼 테다.
 승현은 바로 옆에 있는 방 문을 거의 부수다시피 걷어차 열었다. 비슷한 느낌의 방이었지만 안에는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다음 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책장만 가득 차 있었다. 다음 문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계속해 문을 열었지만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계속 쌓여가는 분노에 지쳐 차라리 꿈에서 깨어나길 바라며 승현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문을 벌컥 열었다.


 
 "안녕?"
 "..너..!!"
 "화내지 말고. 숨어버린 건 '내'가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고 입술을 매끄럽게 말아올려 웃는 건 승현이 여태껏 알고있던 권지용이 아니었다. 방도, 여태까지와는 전혀 달랐다. 푹신한 소파에, 커다란 침대와- 화려한 샹들리에. 만나면 두들겨 패 줄 거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물이라도 끼얹은 것 마냥 차갑게 식었다. 긴 소파 위에 늘어지듯 엎드려 있던 그는 푹신한 러그가 깔린 바닥을 맨발로 딛고 승현에게로 다가왔다. 가늘고 길게 뻗은 다리는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손가락이 승현의 손목에 가볍게 감겼다.

 

 "들어와. 기다리다 지친 건 네가 아니라 나니까."
 ".......너, 누구야."
 "나? 나는- '널 만나고 싶어하는 나' 야."

 

  승현이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리자 그는 소리높여 웃었다. 손목을 잡고 방 안으로 끌어당기고서는 목에 팔을 감았다.

 

 "널 부른 건 '나' 고, 네가 지금 찾고 있는 건 유난히 겁도 많고 솔직하지 못한 '나' 야. 넌 원래 여기로 오게 되어 있었는데- 뭐가 잘못된 건지 그곳으로 가 버렸지 뭐야. 네가 여기로 왔으면 아무 문제 없이, 꿈에서 둘다 즐기고 깨끗하게 끝낼 수 있었을 텐데 말야."
 "너 다중인격이냐? 무슨 개소릴-"
 "아니, '나'는 나야. 사람이 종이 위에 그린 그림처럼 한 가지 면만 존재하는 건 아니잖아? 네 안에도 모순이라는 것 쯤은 존재하지 않아? 그런 거야. 네가 찾는 '나' 와 여기 널 만나고싶어하는 '나'라는 것은."


 
 승현에게 이해할 시간을 주려는 듯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붉게 웃어 보였다.

 

 "이해 못하겠으면 그냥 이해하지 않아도 돼. 세상에 꼭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일만 일어나는 건 아니니까."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전에 없이 달큰하다. 이것은 명백한 유혹이다. 승현은 뒷 머리가 쭈뼛하고 서는 느낌에 몸을 작게 뒤틀었다. 양 손으로 승현의 뺨을 감싸쥔 그는 눈을 휘며 웃었다. 분명, 그 '권지용'도 이렇게 웃었지만 여기 이 사람에게는 노골적인 색향이 묻어 있었다. 단지 욕구에 굶주려 달려드는 것이 아닌,  관능적이고 대담한- 그런 본능이. 닿은 것은 별다를 것도 없는 피부일 뿐인데 방 안의 공기는 이미 정사의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굳이 '그'를 찾을 필요가 있어? '그'는 널 두려워해."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
 "쉬운 얘기야. '그'는 겁쟁이고, 욕심쟁이니까. 이 수많은 방에 차곡차곡 쌓아둔 자신의 것들을 포기하기는 싫지만, 그 방은 이제 지겨울 거야."
 "근데 왜 날 두려워한다는 거야."
 "출구는, 너니까. 뭐, 너라면 문을 열어주는 게 아니라 전부 때려 부숴서 나가게 해 줄 것 같지만. 그래서 널 불렀어."

 

 부드럽고 폭신한 입술이 승현의 목덜미에 닿았다. 하지만 승현은 그 입술을 가르고 쏟아진 말들에 머리가 복잡해서 그런 유혹에 하나하나 가슴 설레여할 여유가 없었다. 젠장, 꿈 주제에 뭐가 이렇게 복잡한 거야. 승현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트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그는 작게 웃으며 머리칼을 다시 정돈해 주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져서 조금 멍해진 기분으로 승현은 그의 적극적인 애무를 받고 있었다. 어느새 그 손에 이끌려 소파 위에 누워 있었고, 그 위에 올라탄 그는 고양이처럼 허리를 숙이고 가슴팍에 입을 맞췄다. 승현이 별다른 반응이 없자 살짝 미간을 찌푸린 그는 승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거머쥐고 머리를 가깝게 끌어당겼다. 붉고 뜨거운 혀가 귓바퀴를 낼름 핥았다.

 

 "너무 고민하지 마. 네가 깨어난 다음에 기억할 건 여기 이 '나' 도 나의 일부분이라는 거 하나뿐이니까. 꿈에서는 나뉘어 있지만 우리는 원래 하나. 너를 만나고 싶어하는 나도, 만나고싶어하지 않는 나도 결국은 하나야."

 

 아, 그런 거군. 승현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한 '그'의 손목을 꽉 붙들었다. 할 마음 같은 건 저 멀리 사라져버린지 오래였다. 손목을 꽉 붙잡고 눈싸움이라도 하듯이 시선을 고정했다. 그는 피하지 않았다. 죽여버리고 싶어. 강렬한 충동이 머릿속을 가득 지배하고 있었다. 무엇으로부터 기인한 감정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승현이 이 순간 하고 싶은 건 몸과 몸을 섞는 행동이 아니었다. 이따금 이 꿈을 꿀 때 마다 그 가는 목을 졸라버리고 싶다는 기분에 휩싸이기는 했었지만 이 정도였던 적은 처음이었다.
 무엇인가에 이끌려 승현은 손을 뻗어 목을 감싸쥐었다. 손아귀 아래에서 뜨겁게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가는 목은 힘을 조금만 더 주면 금세라도 부러질 것 같았다. 점점 더 손에 힘을 주자 그 팔딱임이 손에 선명하게 느껴졌다. 고통스러운지 발버둥치는 몸을 내리누르고 목을 졸랐다. 승현의 손과 팔을 마구 긁어내리던 손에 점점 힘이 빠졌다.

 

 

 툭. 손이 떨구어지는 것과 동시에 승현은 잠에서 깨어났다. 두 손에 아직도 선명한 감각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악몽이라면 지독한 축에 속하는 꿈이었다. 땀에 흠뻑 젖어 이마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승현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던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4시 20분. 창 밖은 어슴프레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

 


 
 "헉..!!"


 
 무언가에 소스라치게 놀라 지용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꿈을 꾼 건가. 하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진 않았다. 볼이 건조하게 당겨오는 느낌에 손을 가져다 더듬어보니 말라붙은 눈물 자욱이 느껴졌다. 의아함에 베갯잇을 살펴보니 눈물에 젖은 듯 축축해져 있었다. 대체 무슨 꿈을 꿨던 것일까. 꿈에 나오는 최승현이 단지 상상의 산물만은 아니란 것을 깨달은 지금 기억나지 않는 꿈은 불안감을 키울 뿐이었다.
 벽에 걸려있는 시계는 4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겠지만 지금은 다시 잠드는 게 두려웠다. 이러다 불면증이라도 걸리게 되면 어떡하지.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학교에 일찍 갈까. 잠시 생각해봤지만 저번에 이른 시간 학교에 갔다가 승현과 마주쳤던 일이 생각나 주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 복잡한 머리로는 책을 펴도 공부가 될 리도 없었고. 이리저리 뒤척이며 뭉기적대던 지용은 결국 침대에서 내려왔다. 설마 또 그런 식으로 마주칠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게 되뇌이며 계속해서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저도 모르는 사이에 지워내고 있었다.


 


 지용이 일어나 씻고 돌아다니는 소리에 잠귀 밝은 지용의 어머니가 안방 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의 얼굴 위에 드러나 있는 것은 자신의 수면을 방해받은 것에 대한 명백한 짜증이었다. 시계를 한 번 쳐다본 그녀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졸리니까 밥은 알아서 챙겨먹으라는 말만 남기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새삼 별다를 것도 없는 반응이었기 때문에 지용은 냉장고 안의 차갑게 식은 반찬들로 적당히 아침을 때웠다.
 언제나 자신의 일이 제일 소중했던 여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이 뒤쳐지는 것도 용납하지 못하는 여자였다. 한때는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받으려고, 칭찬을 받아 보려고 발버둥쳐봤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것 따위 포기한지 오래였다. 다만 이제는 그 짜증스런 목소리가 싫어 적당히 '평균 이상' 의 기대치를 채워주고 있을 뿐이었다. 꿈도, 의지도, 목표도. 이 손 안에는 없었다. 지독한 무기력감은 이미 자신의 일부였다.


 
 조용히 신발을 신고 현관문 문고리를 잡은 지용은 잠시 멈춰섰다. 굳게 닫힌 방문에, 혹은 텅 비어있는 집에 대고 하는 무의미한 인사라 해도 꾸준히 해 왔던 자신이 갑자기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게 무슨 소용이었나. 그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 않아도 될 짓을 굳이 할 이유는 없으니까. 잠시 집 안을 돌아다보던 지용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여름이 성큼 다가온 아침날의 공기는, 더이상 서늘하지 않았다.


 
 


 이른 아침의 학교는 지나칠 정도로 조용했다. 복도를 걸으면서 들리는 것은 자신의 발걸음 소리와 창문 너머 저 멀리 도로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가 전부였다. 문을 열고, 닫고- 책상을 빼서 앉기까지 자기가 내는 소음, 혹은 소리들이 너무나 잘 들려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시간은 5시. 간간히 이 시간에도 학교에 와 있는 녀석들이 있기는 했지만 확실히, 누군가 있을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지용은 책상 위에서 가방을 끌어내리고선 밤 동안 차갑게 식은 책상에 볼을 대고 엎드렸다.
 지용의 자리에서는 창 밖으로 운동장이 훤히 내다보였다. 누가 오는지 볼까. 그런 생각을 하고서는 몸을 일으켜 창문턱에 몸을 기댔다. 맨 살갗에 닿아오는 시멘트가 차가웠다. 수위 아저씨가 한두번 왔다갔다 했고, 아침 운동을 하러 나온 사람들이 운동장 철봉에서 머무르다 갔다. 한 10분인가 그렇게 쳐다보고 있었을까. 교문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을 보고선 지용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 좋지 않은 시력이었다. 귀찮아서 안경을 쓰고 있지는 않았지만 저 거리의 사람이 확실하게 누군지 알아볼 만큼 양호한 시력은 아녔다. 하지만, 알 것 같았다. 말도 안돼. 지금은 거의 아무도 없는 시간이었고, 분명 최승현은 곧장 교실로 올라 올 터였고 그렇게 되면 또다시 둘이 마주치게 된다. 저번에는 여섯시 즈음이라도 됐었지, 지금은 다섯시가 조금 넘은 시각.
 정말, 최승현인가. 알아볼 수 있을 거리가 되면 확인하고, 맞으면 피하자. 그렇게 생각한 지용은 잠시동안 창가에 붙어 서서 그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고개를 든 최승현과 지용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최승현도, 권지용도. 서로를 알아봤다. 그대로 운동장 어귀에 멈춰 선 최승현은 한참동안 지용을 올려다보다가 씨익 웃고선 거의 뛰듯이 학교 안으로 들어왔다. 시선의 주박이 풀리자마자, 지용은 황급히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여기 있으면 안돼. 열린 곳을 찾아야 했다. 대부분의 교실들은 지금 문이 잠겨 있었고, 섵불리 계단으로 움직였다간 마주칠 게 뻔했다.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이 이 상황은 위험하다고 끊임없이 경고해오고 있었다.
 복도에서 좌우를 둘러보던 지용의 귀에 계단을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가깝다..! 교실만은 피해야 했다. 계단으로 올라가기엔 이미 늦었다. 부디 들키지 않길 바라며 지용은 화장실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가장 안쪽 칸으로 들어가 문에 붙어 서서 덜덜 떨고 있었다.


 발소리가 들렸다. 화장실을 지나쳐 지용의 반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어젖히는 소리가 나고, 의자를 당기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지용은 화장실을 뛰쳐나왔다. 다른 곳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곧 그 생각을 뼈저리게 후회해야만 했다. 교실 문 바로 앞에 최승현이 있었다.

 

 

  승현을 보자마자 이를 악물고 달리는 지용을 본 승현은 놓칠세라 뒤따라 뛰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이 풀리기라도 한 건지 지용은 몇번씩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그 때 마다 둘 사이의 간격은 성큼성큼 줄어들었다. 계단에 이르러 위쪽을 택하고 뛰는 지용의 뒷모습을 보고선 승현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제 무덤을 파는 꼴이 됐군. 조금 만 더 가까워지면 손을 뻗어 잡을 수 있었지만 승현은 그저 그 뒤를 바짝 쫓기만 했다. 그리고 결국 지용의 앞에 나타난 것은 굳게 닫힌 옥상문이었다.

 

 "숨바꼭질은, 재미있었어?"
 


 승현은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꺼냈다. 옥상 열쇠를 몰래 복사해 둔 게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은 몰랐지. 짤랑, 승현이 꺼내든 열쇠가 지용의 귓가에서 가볍게 흔들렸다. 옥상은 학생들에게 개방되는 장소가 아니었다. 도망칠 수 없다. 누가 와서 벗어나게 될 확률도 제로에 가깝다. 등을 돌린 채 문에 바짝 붙어있는 지용이 지금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 지 승현은 궁금해졌다. 승현의 신경을 자꾸 건드리는 존재.  그 겉껍질을 산산히 부수면 드러나는 것은 무엇일까. 바싹 다가서서 귓가에 나즉하게 속삭이자 몸이 흠칫 떨렸다. 귀와 목덜미가 예민한 게 꿈과 같았다.

 

 "이건 꿈이 아냐, 권지용."

 

 그리고 승현은 잠긴 옥상 문을 열고 밀어젖혔다. 문은 두 사람이 지나간 후에 다시 굳게 잠겼다. 어깨를 떠밀어 옥상 안으로 지용을 몰아넣은 승현은 이내 그 머리칼을 휘어잡고 물어뜯듯이 입을 맞췄다. 어깨를 밀어내려는 손은 붙잡혀 머리 위로 내리눌러졌다. 다리도 버둥거려봤지만 허벅지가 무릎으로 눌린 뒤에는 별 수가 없었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입술을 피했다. 계속된 거부에 짜증이 난 듯 승현이 몸을 일으켰다.

 

 "왜, 하던 것 처럼 다리 벌리고 안겨봐. 싫어?"
 "그건, 꿈이잖아..!!"
 "그래서, 다른 게 뭔데? 너 말야, 날 피하고 싶으면 피할 수 있는 거였더라? 이번처럼. 여태껏 잘도 안겨놓고선 실제로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까 싫어?"

 

 그르렁대듯 낮은 목소리로 내뱉은 승현은 손으로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꿈에서도 유난히 민감해서 등을 쓸어주면 길게 신음하며 몸을 뒤틀곤 했었다. 그리고, 역시 같은 반응이었다. 지용도 자신이 꿈과 같이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붉게 물든 얼굴에 드러난 것은 다름아닌 당혹감과 두려움이었다. 승현은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무엇을 봐도 꿈과 같은데 자기만 끝까지 아니라고 거부하는 모습이 우스웠다.

 

 "같은 곳을 느끼고 있잖아, 너. 알아? 귀를 깨물어도,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어줘도 좋아했지. 구멍 안쪽도 똑같지 않겠냐? 몇번이나 박아댔던 곳인데,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아?"
 "이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야...!! 단지 꿈일 뿐이라고, 그건..!!"
 "내가 열받거든. 꿈도 정도껏이란 생각은 안 해? 우린 진짜로 섹스했던 거나 다를 바가 없어. 실제로 한다고 뭐가 더 달라져?"
 "싫어... 안 돼..!! 난, 난-"
 "겁쟁이. 뭐가 그렇게 무서워? 아-."

 

 자조적으로 웃은 승현은 지용의 볼을 톡톡 두드리다 아플 정도로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작은 비명이 터져나왔지만 승현은 아랑곳않고 손아귀에 힘을 더 주었다.

 

 "정상이 아니게 되는 게 그렇게 싫어? 인정하기 싫은거지? 남자에게, 그것도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자식에게 발정하는 너를!!"
 "큭- 흐으, 무슨-.."
 "모를 거라고 생각했냐? 꿈에선 달콤한 말을 지껄이고 다리를 벌리는 주제에 넌 항상 날 경멸하는 눈으로 쳐다봤잖아. 처음엔 나도 너한테 관심 따위 없었으니까 상관하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거든."
 


 승현이 쏟아내는 말들에 지용은 왠지 정신이 아득해져감을 느꼈다. 목을 죄어오던 손은 이미 없어졌지만 다른 의미로 숨이 턱턱 막혀왔다. 저항할 의지마저도 잃은 채 지용은 승현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최승현도 무엇인가에 지독하게 쫓기고 있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는 걸. 그를 뒤쫓고 있는 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저런 표정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이 저런 모습을 하고 있었을 테니까.
 

 무섭지 않다. 아마 그런 것 같다고 지용은 생각했다.

 

 "도망치면 쫓아가 주겠어. 널 깨부숴서라도 끌어낼 거야. 날, 제대로 보게 할 거라고."

 

 굶주린 것 처럼 달려드는 승현을 더이상 밀어내지 않았다. 익숙한 열기에 휩싸여 몽롱해진 정신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너무나 넓었다. 아, 그런 거였구나. 지용은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던 팔을 들어 승현의 어깨를 꽉 안았다. 그것은 꿈에서 몇 번이고 끌어안았던 어깨였다. 달려들던 승현의 움직임이 잦아들었고, 눈이 마주쳤다. 지용은 승현의 얼굴을 끌어당겨 키스하고는 작게 속삭였다. 어느 초여름날, 새벽과 아침의 경계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Posted by 달달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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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비밀

Text 2009. 5. 15. 17:37






 










 

 

 

 


 시선이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아니, 주목하지 않게 되는 게 더 이상했다. 그만큼 최승현은 눈에 띄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아직은 거친 얼굴선은 곧 어른이 되면 그 날카롭게 정리될 것이었다. 맨 뒷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심드렁한 얼굴로 창 밖을 바라보거나 엎드려 자기만 하는 게 학교에 뜸하게 나와서 하는 일의 전부였다.
 그리고 권지용은 그런 최승현이 썩 달갑지많은 않았다. 분명 화려해 보이고 제 하고싶은 대로 하고 있는 게 어린 마음에는 멋져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자신은 성숙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졸업을 하게 되면 결국 별 것 아닌 인생을 살 게 뻔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주 뛰어난 것은 아녔지만 지용은 나름대로 착실하게 주변의 요구에 맞춰서, 열심히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일도, 하고싶은 것도 있었고 부모님과 선생님의 기대를 저버리기도 싫었으며 친구들에게 사교성 좋고 성실하다는 평가를 듣는 게 좋기 때문도 있었다.




 분명 한심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지켜보고 있었다. 행동 하나를 눈으로 좇고 있었다. 그렇게 지켜보면서, 지용의 마음 한구석에는 묘한 기분이 조금씩 움트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질투였고, 박탈감이었다.

 




 "요번에 보니까 성적이 좀 떨어졌던데. 다음엔 잘 해봐."
 "네. 안녕히 계세요."
 "아참, 오늘도 최승현은 결석이냐?"
 "아뇨- 2교시에 오긴 했지만요."
 "그러냐. 요즘은 학교에 오기는 하는구나. 그래, 올라가 봐라- 오늘 종례는 내가 못하니까 네가 적당히 알아서 잘 끝내고."
 




 

 싹싹하고 예의바르고 성실한 3반 반장. 조금 더 노력한다면 최상위권 대학을 노려볼 만한 성적. 그런 평가들이 싫지 않았으니 기꺼이 받아들인 짐들이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주어진 기대감도, 의무감도, 책임감도. 하지만 요즘 들어서 그런 짐들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최승현 때문인가.
 지용이라고 매일이 즐겁고 좋아서 아침 일찍 일어나 늦지 않게 학교에 오고 졸음을 참아가며 수업을 듣는 게 아녔다. 목표하는 바가 있다지만 그것과 이건 별개였다. 싫은 건 싫은 것, 힘든 건 힘든 것이니까. 깨달아가면 깨달을수록 지용은 어딘가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억지로 눌러놓은 모든 욕구들이 이때라는 듯이 깨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용이 도무지 알 수 없는 기묘한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눈 앞이 무언가에 가려진 듯 어두웠다. 제대로 몸을 가눌 수도 없었다. 그저 늘어진 채로 신음하고 있을 뿐이었다. 해방되지 않는 몸 속의 열기는 정신을 마음대로 휘저어 놓았다. 고통스럽기만 했다. 전신을 뛰노는 열기에 울면서 가슴팍을 몇 번이나 긁어내려도 방법이 없었다. 그런 의미 없고 영문 모를 꿈이 몇번이나 계속되었다. 깨어나면 온 몸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가끔은 울기라도 한 것 처럼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꿈에는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 막연하게 느끼고 있었다. 뜨거운 몸에 서늘한 손이 닿으면 그게 너무나 기분 좋아서 정신없이 매달렸다는 기억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으레 거의 모든 꿈이 그렇듯이 일어나서 학교 갈 즈음이 되면 그 꿈은 기억에서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그러나 한번,두번 반복해감에 따라 꿈은 또다시 변화하고 있었다.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열은 점점 식어 서서히 눈 앞이 보였다. 지용은 꿈 속의 상대가 누구인지, 자신이 꿈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천천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 역시도 아침이 되면 희끄무레하게 지워져 갔지만 자신의 꿈에 승현이 나오고,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기억에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실제로 속옷에 남은 흔적이 제일 충격이었지만 그 때 지용은 깨달았다. 자신은 남자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왜 남들이 다 하는 몽정이 자신에겐 제대로 찾아오지 않았으며 여태껏 그리 성적인 것들에 담백했었는지. 그 모든 것의 답이었다.

 


 








 요즘들어서 잠이 쏟아지는 것을 참을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아침에 꿈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라듯 일어나는 것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깊게 잠에 들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안그래도 졸린데 앞에서 수업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졸리면 그거야말로 쥐약이었다. 만만한 선생님이면 요령껏 졸겠지만 지금 앞에서 위협적으로 회초리를 휘둘러 가며 자습서 그대로 칠판에 베껴 적고 있는 영어 독해 선생은 조는 걸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게다가 한번 찍히면 1년 내내 고생한다. 이유 없이 때리고 괜한 트집을 잡아 벌주기 일쑤였으니까. 그래서 수업을 진심으로 듣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수업 시간에는 모두가 깨어 있었다. 제멋대로 구는 반의 몇몇들도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긴 하지만 적어도 엎드리지는 않았다. 흔히 말하는 '노는'학생이 걸릴 수록 더 악랄해지는 저 사람의 성격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름 예쁨 받고 있는 지용이라지만 그래도 마음 놓고 졸 수는 없었다. 허벅지를 꼬집어 가며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올리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서 버럭 소리를 질러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너!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게 뭐야. 일어나."
 "아...아무것도 없었는데요."
 "내가 똑똑히 봤는데 시치미 떼는거냐? 이 새끼가 돌았구만? 당장 숨긴 거 내놔. 핸드폰이야, 만화책이야? 어?"
 "정말 아무것도 안했어ㅇ-악!!"
 "너 이 새끼. 너 지금 날 우습게 아냐?"

 


  거칠게 내려친 손바닥에 고개가 확 돌아가는 게 보였다. 계속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서 항변하는 목소리를 묵살하고 그 선생은 머리통만 후려치기 시작했다. 다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지용도, 그리고 그 주변에 있던 몇몇도 정말로 그 친구가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안된 일이지만 대신 나서서 말해줄 수는 없었다. 불똥이 자신에게 튈까 무서웠기 때문이다. 저 선생의 하는 작태가 너무나도 아니꼽고 화가 나지만 그것과 자신의 안위는 별개였으니까.


 


 "이 새끼가 그래도-"
 "저기요."


 

 
 낮고 거친 목소리가 일방적인 구타를 비집고 들어섰다. 그 목소리에 선생은 때리던 손을 멈추고 목소리가 나온 쪽을 휙 돌아봤다. 최승현이 손을 반쯤 들어올리고 있었다. 다들 그걸 보고 숨을 헉 하고 들이켰다. 안그래도 저 선생은 최승현을 마음에 안 들어하고 있었다. 이걸 빌미로 더 미쳐 날뛸 지도 모른다. 그냥 가만히 있지 왜 끼어들고 지랄이냐, 지랄이. 수근거리는 목소리가 조용히 퍼져 나갔다. 하지만 지용은 뻣뻣하게 굳어서 승현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걔 진짜 아무것도 안했거든요. 엄한 애 패지 말고 수업 마저 하시죠."
 "너, 지금 말투가 그게 뭐냐?"
 "트집 잡으실 거면 그냥 차라리 복도로 내쫓던가요."
 "..........당장 나가. 그리고 수업 끝나면 따라서 교무실로 와. 그리고 너 이 새끼. 오늘은 그냥 넘어가는데 다음 한번 더 걸리면 그때는 정말 뒈지는 줄 알아."

 



 

 선생의 말이 끝나자마자 최승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복도로 나가 버렸다. 그리고 수업이 끝났을 즈음에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아마도 본인은 그저 수업 듣기가 지루하고 짜증나서 적당히 기회를 봐 나간 것일지도 모르지만, 최승현은 그 일로 은근한 인기를 얻었다. 괜히 나선다는 평가도 꽤 있었지만 그래도 끝은 으레 뭐, 그래도 좀 폼나긴 하더만- 으로 맺어졌다.



 

 
 "야, 진짜 장난 아니지 않았냐. 나같으면 무서워서 대들 생각도 못한다."
 "대든 게 잘한 건 아니잖아."
 "그래도- 와씨. 그냥 인생 포기하고 막 사는 놈인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봐."
 ".......뭐."

 




 그게 왜 그렇게 연결되는 거냐, 라는 말 같은 건 안으로 꾹꾹 밀어넣었다. 하지만 자신도 그 생각에 동조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아니라고 말은 해도, 자신은 느껴버렸다. 저런 건 멋진 게 아니라 괜한 개폼이라고 학습받아 왔고 그렇게 생각해 왔었지만, 결국은 자기도 저런 식으로 한번쯤은 행동하고 싶었던 거였다. 저건 바보같은 짓이라며 차갑게 식어있는 머리와 흥분으로 들떠있는 가슴은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며 엇나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뭐가 옳은 건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날의 꿈은 다른 날보다 조금 더 격렬했다. 지용은 이제, 빼도박도 못하게 자신의 꿈을 인식하고, 인정해야만 했다. 단편적으로만 남아있던 꿈들은 이제 점점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가끔은 꿈 속에서 입술이 닿았던 자리가, 정말 닿기라도 한 것처럼 화끈거려 오기도 했다. 무엇보다. 꿈 속의 최승현이- 실제의 너도 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냐, 라고 몇 번을 물어오자 정말 의심이 들었다.



 

 이것은 꿈일까.

 

 

 


 










 

 

 "이건 꿈이야."

 




 그렇게 최승현의 귀에 속삭이면서 지용은 좀 더 대담하게 다리를 벌려 승현을 끌어당겼다. 승현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것은 헛된 꿈을 꾸고 있는 자신에게 하는 말. 요즘 가끔씩 닿아 오는 승현의 시선에 이게 설마 꿈이 아녔던 걸까, 하고 헛된 상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다잡기 위한 말이었다. 꿈이 깨고 나면 대부분의 것들은 흐릿해지겠지만 그래도-

 꿈 속의 지용은 지용이 아니었다. 마치 처음부터 다른 인격이었던 것 마냥 웃음을 흘리고 쾌락에 겨워 허덕여하며 부끄럼도 잊은 채 욕구에 충실했다. 고통에 섞여드는 미묘한 이질감이 온몸을 뒤흔드는 열기로 바뀌는 그 순간이 너무나 좋았다. 제 맘대로 지용의 몸을 다루는 승현의 서늘한 손길이 좋았다. 그 큰 손으로 등을 쓸어오고 허벅지를 문질러 오면 지용은 가늘게 울며 신음했다. 꿈이라고 계속 웅얼대는 지용에게 화라도 난 것인지 승현은 평소의 꿈보다 거칠었다. 대뜸 우악스럽게 다리를 벌려 몸 쪽으로 밀어붙이고 질러들어왔다. 무리하게 접힌 허리가 아프고 눈 앞에 드러나버린 접합부에 수치심마저 일었지만 동시에 밀려드는 포만감과 등골을 달리는 쾌감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게 되었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아서 허우적거리다가 시트를 잔뜩 틀어쥐고 울었다.


 
 


"하아, 악- 아흑...아..아아-"

".....하.......꿈이라고-"
 




 분명 지금 승현은 화가 나서 거칠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런 행동들은 지용의 흥분을 부추기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지용은 발정난 고양이마냥 흐느끼며 승현을 먹어치울 듯한 기세로 안겨들었다. 콱콱 박혀드는 것이 머리까지 난잡하게 뒤흔들어 놓는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미쳐버리고 말 거야. 아니, 이미 얄팍한 이성은 무너질 대로 무너져 있었다.

 다른 때보다 더 강렬하게 갈구하고 있었다. 시선을 느끼고 있었지만 바라보고 있는 눈과 돌아보는 눈이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지용은 그 때 평소처럼 웃어 보일 수 없었다. 그 짙은 눈이, 명확하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발 끝에서부터 기묘한 감각이 치달아 올라왔기 때문에. 그리고 그 시선에 꼴사납게도 흥분해 버렸다.

 



 "...흐.....그럼....이게 꿈이 아니면-아흐으으-"

 "웃기지마......이런, 꿈은- 들어본 적도 없어.... 시치미 뗴지 마. 꿈에서는 이렇게...놀아도-..... 진짜는 싫다 이거야?"
 "하......하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꿈이 아닌 현실에서-라니. 그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이런 일탈은 꿈이기 때문에 허용되는 일이었지 그게 현실이 되는 건 상상할 수 조차 없었다. 안돼, 이 이상은- 어딘가 다급해진 지용의 몸은 급속히 식었다. 아직도 달려드는 승현에게서 도망치려 필사적으로 침대 위쪽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승현의 손이 먼저 지용의 머리채를 잡고 시트에 짓눌렀다. 허리를 꽉 붙들고 다시 삽입한 승현은 정말로 지용의 사정 같은 건 봐주지 않고 마구 몰아쳐대기 시작했다.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이대로 꿰뚫려 두 조각이 나는 건 아닐까.

 깊숙한 곳에 자신을 밀어넣으며 승현은 지용의 귓가에 으르렁대듯 말했다. 그 목소리에 지용은 또 다시 파드득 몸을 떨었다.

 




 "그렇다면.........억지로라도,끌어내야지."

 




 무언가가, 크게 어긋나 버리기 시작했다. 억지로 끌어올려진 쾌감의 정점에서 지용은 화들짝 놀라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그날의 꿈은, 여태까지의 그 어느 꿈보다도 선명하고 생생했다. 닿았던 자리들마저 화끈거려올 정도로.

 

 

 

 

 

 

 

 

 





 "........누구 덕분에, 나도 존나 뭣같은 꿈을 꿨거든?"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승현의 시선은 어젯밤 꿈에서 봤던 것과 너무나 똑같았다. 승현이 한 걸음 다가서자 지용은 뒤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금세 등이 벽에 부딪혔다. 퇴로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궁지에 몰린 초식동물처럼 잔뜩 털을 곤두세우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리 싱숭생숭했어도 학교에 일찍 오진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최승현이, 이런 시간에 학교에 올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지용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억지로라도 끌어내겠다는 그 말을. 그리고 그것은 지용의 세계를 산산히 부숴 버릴 것이 분명한 일들에 대한 경고이자 예고였다. 쌓아왔던 가치관부터 권지용이라는 인간 자체까지, 모두 다.

 



 "나 혼자 잠 설치는 건 너무 억울하잖아. 그런데 보니까 그건 아닌 것 같네."

 "그-"

 



 그게 무슨 말이냐고, 억지로 웃음이라도 지어보이려던 시도는 문을 거칠게 밀고 들어온 반 친구에 의해 무산됐다. 날카롭게 쏘아보던 눈이 거두어지자 지용은 숨통이 트인 듯 크게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말도 안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상식적으로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군가와 같은 꿈을 꾸고 있다니. 지용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서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렇다면 최승현의 그 말들은 대체 뭐지. 불안감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래서는 안되는데. 대체 어디서부터가 꿈이고 어디서부터가 현실인지 잘 모르겠다. 모든게 머릿속에서 뒤엉킨 기분에 한숨이 쏟아졌다.

 


 최승현이 두려웠다. 이건 아니라는 말만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렇게 지용은, 모든 의구심과 호기심을 마음 깊은 곳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그것은 자신의 다른 모든 것들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발악이었다.










 

Posted by 달달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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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락의 꿈

Text 2009. 5. 9. 21:53


 

 

 







 

 

 

 숨이 가쁘다. 어지럽다. 몸 안을 날뛰는 열기에 정신마저 혼미해지는 그런 아련한 고통이었다. 승현에게 있어 권지용을 떠올린다는 것은 그런 일이었다. 상상만으로 몇 번이고 울리고, 끌어안고, 범하고, 범하고, 범하고. 온몸에 피어오른 열에 신음하며 우는 지용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치사량의 극독이었다. 눈에 어린 물기가 요사스러울 정도로 빛을 담고 반짝였다. 지용은 이미 승현에게 있어, 꿈 속의 마돈나였다.

 

 

 얼마 전 까지만 하더라도, 승현에게 있어 지용은 단지 같은 반 녀석일 뿐이었다. 노는 패들도 완전히 달랐고 성적부터 품행까지 접점이라곤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용이 난데없이 승현의 꿈에 나타나기 전 까지는- 승현은 지용에게 별다른 관심은 없었다. 기묘한 꿈이었다. 어딘가 묘하게 틀어진 그 현실감. 마르고 새하얀 나신은 홀로 신음하고 있었다. 너무나 생생했다. 꿈에서 으레 느껴지는 미묘한 속도감이나 통제 불능의 자신은 그곳에 없었다. 얼마든지 뒤돌아서 다른 곳으로 나갈 수도 있었다. 그런 꿈이었다.
 하지만 손을 대버렸다. 그리고 그에 화답해 지용의 몸도 활짝 열렸다. 땀에 젖은 살결이 달라붙는 그 느낌까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생생했다. 꿈에서 지용은 처녀처럼 아파했고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다가도 과감하게 다리를 벌리곤 매달려왔다. 정신없는 열락의 꿈. 깨어나고 나서 승현을 맞이한 것은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던 그 황량한 방이 아닌, 몇 번이고 본 천장과 잔뜩 젖어버린 속옷 뿐이었다.

 

 "...미치겠다...."

 

 바라본 시계는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일어나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하지만 승현은 자신이 곤란하지 않도록 일찍 깨워주는 이 꿈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벌써 몇번째일까, 이 꿈. 처음 한 번은 개꿈이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 다음번엔 내가 이 정도로 궁했던 건가 하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제는 세는 것 조차 포기했다. 그 사이에 꿈 속의 지용은 승현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이름을 불러오기 시작했다. 나누는 것은 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간간히,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것은 정사 도중이기도 했고, 한 번의 열락 뒤에 식힌 몸을 다시 달구는 과정에서이기도 했다. 정말 사소한 이야기들이었다. 이게 꿈이 맞을까? 아마도 꿈이겠지. 너도 꿈을 꾸고 있어? 어느 날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서 계속 이야기만 했던 날도 있었다.
 이래서야, 정말- 권지용과 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제는 그게 꿈인지조차 의심되곤 했다. 기묘하지만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현실감이 이게 단순한 꿈은 아니란 걸 계속 승현에게 알려오고 있었으니까. 혹시 내게 몽유병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승현은, 정말 진심으로 고민했다.

 

 

 

 

 

 

 

 

 


 하지만 이게 꿈이 아닐 리 없었다. 승현으로서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다리를 벌려오며 잠깐씩이지만 닳아빠진 창녀같은 모습을 내보이는 권지용과, 그저 활달하고 사교성 좋은 반장일 뿐인 녀석이 같은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맨 뒷자리에 늘어지듯 앉아 있던 승현은 고개를 돌려 교실 한편에서 왁자하게 떠들고 있는 무리 속의 권지용을 바라봤다. 하얀 와이셔츠가 잘 어울린다. 마냥, 어려 보인다. 왜 하필이면 권지용이었을까. 그런 모습으로 나오는 게 다른 누구도 아닌 권지용인 이유가 무엇일까.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래, 뭐라고 해야 할까- 승현은 적당한 말을 찾기 위해 잠깐 고민했다. 굳이 말하자면 꿈에서의 그는 붉은 느낌이었다. 붉고,붉어서 닿으면 손 끝마저 새빨갛게 젖어 버릴 것 같은 그런 느낌. 하지만 저기서 이를 활짝 드러내며 웃는 저 모습은 그저 하얗고, 하얗기만 했다. 흠 없고 구김 없는 그런 느낌. 저런 권지용이 그럴리가.
 


 하지만 승현은 얼마 있지 않아 쉽게 단정내버린 자신을 비웃어야만 했다. 의자에 구부정하게 앉아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지용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승현은 그 고개가 천천히 돌아 자신을 바라보는 걸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웃음으로 가늘게 휘어져 있던 눈이 천천히 식어 푸르고 냉한 기운을 띄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심장이 내려앉는다. 승현과 눈이 마주치고서도 지용은 눈을 돌리지 않았다.
 하얗다고? 저건 하얀 게 아니다. 승현은 자신의 부족한 어휘로는 '저것'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붉지 않았다. 하지만-

 


 승현은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순간 차갑게 식었던 피가 이전보다 더 높은 온도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입안이 바짝 마른다. 그는 이제 고개를 돌려버려 이쪽을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푸르게 남은 잔상은 승현의 가슴을 쿡쿡 찔러댔다.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은 흥미와 관심, 그리고 욕구였다. 어째서인지 승현은 그게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기 시작했다.
 뭐가 됐던, 그 꿈은 진짜다. 그러니까 그걸 끄집어 내고 싶었다. 새하얗고 어린 동물의 가죽을 뒤집어쓴 저 권지용에게서 그 모습을 억지로라도 끌어 낼 생각이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여전히 꿈 속의 풍경은 지독하게 황량했다. 침대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방.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밝혀진 조명과 어둠에 젖어 본래 색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벽과 천장. 매번 승현의 꿈은 그 방의 작은 문 앞에서  시작했다. 뒤로는 길고 긴 복도가 놓여 있었고, 그 복도를 따라서 문도 늘어서 있었다. 이 문만 있는 것이 아녔다. 다른 문으로도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승현은 결국 매번 이 곳을 선택했다. 창문 같은 건 없는데도 어디선가 스며드는 한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침대 위에, 권지용이 앉아 있었다.

 

 "안녕."
 "오늘은 평소보다 좀 늦었네."
 "아아. 잠을 늦게 잤으니까."


 
 눈을 휘며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낮의, 학교에서의 미소와는 근본부터가 달랐다. 가느름한 눈에는 항상 물기가 어린 듯 빛이 머물었다. 사람을 홀리는 얼굴이다. 뛰어나게 아름다운 얼굴은 아니었다. 그냥 단순히 '예쁜' 남자라면 승현의 주위에도 지겹게 많았다. 그것보다 하반신 욕구를 더 자극하는 여자들도 많았다.
 그렇지만 왠지 구미가 당겼다. 처음부터 그랬다. 승현인 줄 모르고 그저 급하게 매달려왔던 그 때에도 단순한 흥미만은 아녔다.

 

 "너 말야."
 


 승현은 지용의 목을 한 손으로 살짝 쥐었다. 엄지손가락이 닿은 부분 아래에서 콩콩거리며 맥이 뛰는 게 느껴졌다.


 
 "정말, 꿈이야? 아니면 내가 아는 그 권지용이야?"
 "글쎄. 너는 뭐라고 생각하는데?"
 "잘 모르겠지만- 여기서 네 목을 졸라 죽여버린다면 진짜 너도 죽는걸까."
 


 승현을 올려다보는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작은 입술이 달싹였다. 알고 싶으면, 해봐. 하지만 승현은 그 말에 손에 힘을 빼버렸다.


 
 "그랬다가 진짜 뒈지면 찜찜할테니까 싫어. 그러지 말고 네가 좀 얘기해보지 그래? 너는 뭔가 알고 있어? 진짜 너도 매일 밤 나를 만나고 있는 거야?"
 "이건 네 꿈이야."
 "그래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결국은 꿈이라는 거지."
 

 
 영악하다. 이야기는 둘 다 알고 있는 사실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승현은 조금 작전을 바꿔 보기로 마음먹었다. 머리가 핑핑 도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뭔갈 위해 머리를 써본 적은 거의 없지만 나름대로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원하는 걸 얻어내는 방법 정도는 체득하고 있었다. 푹신한 침대 위로 올라타며 어깨를 밀어 뒤로 눕혔다. 그 눈은 오늘 학교에서와 같이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지만 담겨있는 것은 푸르고 냉한 것이 아닌 뜨겁고, 붉고, 진득한 것이었다. 턱을 붙들고 입을 맞췄다. 얽혀오는 혀가 너무나 익숙했다.
 권지용의 몸은 항상 뜨거웠다. 그 안에 무슨 열기를 그렇게 가둬두고 있는 것인지.

 

 "말해봐."
 ".....하아.뭘?"
 "너에 대해서. 어차피 꿈일 테니까 내 맘대로 생각한 내용 아니겠어?"
 

 

 몇 번이고 몸을 섞으며 알게 된 민감한 부분들을 자극하자 더운 숨이 흩어졌다. 하아, 하고 내뱉는 숨에는 명백한 웃음이 섞여들어 있었다. 그가 손을 뻗어 승현의 머리카락을 살짝 움켜쥐었다. 나는 말야, 작은 헐떡임이 섞여 있었지만 그는 입을 열어 이야기를 계속해나갔다. 승현은 혼잣말 같은 그 웅얼거림을 들으며 마르고 하얀 몸을 마음대로 열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승현의 손에 익숙해진 그 몸은 한 곳을 자극하면 이어질 자극에 먼저 기대하고 흥분해 있었다.


 
 나는- 전부터.. 널 보고 있었어. 너는 제법 눈에 띄니까 말야. 생긴것도- 하는 짓도. 열기로 혼곤한 와중에도 그는 계속해서 말을 잇고 있었다. 그래서 멋대로 상상하고 있었어. 네가 꽤나 맘대로 놀고 있다는 건 웬만한 애들은 아니까. 남자라도 거절하지 않잖아- 너는. 그리고, 나는 남자를 좋아해. 섹시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안겨도 좋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는 하얗게 웃었다. 도저히 모를 놈이라고, 승현은 생각했다.

 

 "내 꿈이라서, 내 맘대로 생각한 내용 치고는 너무 자세한 거 아냐?"
 "그렇지만 내일 나는 이런 일 같은 거, 전혀 모르는 사람일 텐데 말야."
 "확인해 보도록 할까."
 "아니, 이건 꿈이야."


 
 승현의 얼굴을 양 손으로 붙잡아 키스하며 지용은 다시 한번 더 속삭였다. 이건 꿈이야. 어느 쪽이 원해서 꾸는 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꿈이야. 꿈은 꿈으로 끝인거야.

 

 

 

 

 

 

 

 

 

 

 

 

 

 

 

 꿈은 꿈으로 끝이라고? 승현은 잠에서 깨어나 알 수 없는 화에 시달려야만 했다. 평소였다면 어제 속에 들이부은 술 때문에 지금 시간에 깨어나지도 못했을 터였다. 학교를 나간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테고. 하지만 승현은 지금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느낌이던 뭐던, 학교에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얼굴을 보고, 시치미 떼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꿈은 꿈이라고? 이런 꿈은 듣도보도 못했다. 꿈일 리가 없었다. 나 혼자 착각하고 있는 거라고 꿈 속의 권지용은 계속 말해왔지만 나는 그걸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꿈이라고. 이런 게 꿈이라면 잠 따위 자고싶지 않았다.
 속이 쓰려 당장에라도 위 속에 든 모든 것을 게워내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승현은 고집스레 학교로 향했다. 요즘들어 제 시간에 등교하는 승현을 보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내심 놀란 얼굴들이었지만 지금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당장에라도 멱살을 틀어쥐고 그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 집어 치우라고 하고 싶었다.


 

 분명 속으로는 자신이 미쳐버린 게 아닐까, 하는 자각은 있었다. 이게 꿈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도 없었고 단순한 과대망상일 수도 있다는 것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건 그거대로 화가 나는 일이었고,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한다면 지금 끓어오르는 이 열을 주체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불공평해. 불공평하다, 이건. 욱하고 치밀어오르는 것을 꾹꾹 누르며 교실 문을 열어젖혔다. 생각보다 이른 시간이었어서, 교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문은 열려 있었다. 누군가 먼저 왔다는 소리다.
 교실 안을 둘러보던 승현은 지용의 자리에서 가방을 발견했다. 그리고 뒤이어 닫혀있던 교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세수라도 한 건지 얼굴과 머리카락 끝이 젖은 채인 권지용이 문가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
 "...이 시간에 오냐?"
 "잠을 설치는 바람에. 그나저나.. 너도 이런 시간에 학교에 와?"
 

 

 승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있는대로 말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자신에게 남아있는 한 조각의 이성이 그걸 끝까지 잡아 누르고 있었다. 자연히 이가 악물려졌다.

 


 "........누구 덕분에, 나도 존나 뭣같은 꿈을 꿨거든?"
 

 

 권지용의 입가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승현은 한 발짝 내딛었고, 그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승현이 다시 한 발 다가섰지만 그에게는 더이상 뒤로 물러날 공간이 없었다. 당장에라도 손을 뻗어 저 목을 틀어쥐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옷깃으로 가려진 곳 아래에 어제 자신이 남긴 자욱이 선명하게 남아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승현이었다.

 


 "나 혼자 잠 설치는 건 너무 억울하잖아. 그런데 보니까 그건 아닌 것 같네."
 "그-

 

  지용은, 그 말에 뭐라고 대답하려 했지만 닫혀있던 문을 쾅 하고 열어젖힌 누군가에 의해 팽팽하던 긴장이 순식간에 허물어져 버렸다. 씨발. 승현은 낮게 욕을 내뱉고는 열린 문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그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고 있던 지용은 눈을 감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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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짧게 3편 연작으로 갈 겁니당. 담편은 지용이 시점 위주.


 

Posted by 달달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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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써놓고서도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 미묘했던 글.흔히 있는 호러물 st이긴 한데 주제가 '거울' 이었어서 나르시즘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런 스타일의 글이 가장 쓰기 쉽고- 쓰고 나면 마음에 들 확률이 제일 높다. 왜냐면 반쯤은 내 이야기거든(...) 




 


 이건 실화를 기반으로 쓴 거였긴 했는데-.
어쩌다보니 좀..ㅋㅋ 그렇다. 이건 호와 오의 중간에 있는 글.


 

 사실 써내고서도 내가 어떻게 이런 글을 써냈지, 싶었던.
지금 다시 이런걸 써내라 그러면 아마 못 할거다. 헤르만 헤세의 환상동화집이 모티프.


Posted by 달달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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