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는 연필을 들었다. 무언가를 쓰겠다고 정해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다. 실타래같이 엉킨 상념들을 풀어내기 전까지는 엉킨 그대로 존재할 것이었다. 나는. A는 두 글자를 적었다. 나는 너무도 힘겹다. 다시 적었다. 아니, 나는 힘든 것일까? 잘 모르겠다. 엉킨 실타래는 좀처럼 풀릴 기미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또 다시 한 문장을 끌어냈다. 내가 정말 힘들기 때문에 힘들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아니면 힘들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단지 그렇다고 적고 있을 뿐인 건가. 이번에는 한 문장을 더 써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화다운 화를 내 본 적이 언제의 일이던가. 조금 더 써 보기로 했다. 나는 무감각해졌다. 내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 내가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한다고 학습해왔기 때문에 이름 없는 기분에 억지로 이름표를 붙인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나는 지금 모든 게 지긋지긋하다. 이렇게 지긋지긋하다고 쓰고 있는 내 자신마저 지긋지긋하다.
분명히 내게도 기분을 소리 내어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말하지 않는다. 왜 말하지 않게 되었는지는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다. 말하지 않음으로서 나는 느끼지 않게 되었고 무언가를 느끼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고 또 찾았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서도 만족하지 못했다. 분명 나는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데 모두들 내가 모든 것을 가졌다고 했다. 아마도 나는 내가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에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원한다. 배부른 소리라는 주변의 말들이 너무나 증오스럽다. 나는 이미 많이 가졌으니 내 불만은 배부른 자의 헛소리가 되고 사치가 되어 내게 돌아온다.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는다. 나는 사랑받고 있지만 애정에 허덕이고 남들에 비해 풍족하지만 여전히 빈곤하다.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배부른 소리라는 그들의 말에 동의해 버린다. 내 스스로 나의 입을 틀어막는다. 그래서 나는 쓴다. 외칠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내보일 수 없기에 쓴다. 그저 쓴다.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대상에 대해 갈구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너희들이 보기에 나의 고통은 행복에 겨운 것이고 하잘 것 없어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것 역시도 고통이다. 내 고통을 너희들이 대신 살아주지도 않을 거면서 나의 고통을 경시하지 마라. 나는 숨이 막힌다. 숨이 막혀 허덕이고 있는데 남들보다 나으니 참으라는 말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 고통이 너희의 것보다 작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는가.
A는 거기까지 쓰고 연필을 내려놓았다. 처음의 정갈했던 글씨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거칠어지고 흐트러져 있었다. 숨을 몰아쉬며 A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자신은 틀린 말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자신이 한 말이 틀렸다는 사실 역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A는 다시 연필을 들었다. 이제는 자기 손으로 자신을 깨부숴야 할 때였다. 그러나. 세 글자를 다시 적었다. 그러나, 나는 배워왔다.
그러나 나는 배워왔다. 내가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고 배워왔다. 가슴은 피를 토하며 힘들다고 울부짖어도 머리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안다는 것은 내게는 고통이다. 내 맘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쇠사슬이 배움이다. 머리와 가슴은 멀어진다. 나를 질책하기만 하고 차갑고 냉정하게 판단하기만 하는 것은 머리고 이성이다. 사회 역시 그 잣대로 나를 판단한다. 나는 이 쇠사슬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완벽하게 혼자가 되어 이 세상에 나 홀로 남기 전까지 나는 머리의 지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말하지 못하고 쓸 뿐이다. 울지 못하고 그저 무감각해질 뿐이다. 내가 가지지 않았더라면 배움과 세상은 내 고통을 연민했을까. 마음대로 목 놓아 울어도 됐을까. 그런 것이 소유의 대가라면 없어도 좋다. 하지만 나는 내 소유를 버릴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이 풍족함 속에서 태어나 자랐고 가진 상태로 태어났다. 내게 있어 소유란 나 자신이다. 나는 나 자신을 버리지 못한다.
뚝. 연필심이 부러졌다. A는 연필을 내던졌다. 실타래를 풀어내 보았지만 남은 것은 조각난 실의 잔해들뿐이었다. 손 안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렸다고 하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최승현도, 나도 미쳐있는 게 분명해. 지용은 펼쳐진 연습장에 이런저런 단어를 써 보다 펜으로 마구 지워 버렸다. 그날부터 무언가가 이상하게 어긋나기 시작했다. 아니, 이미 그 전부터 어긋나기 시작했었을런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 균열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은 희끄무레하게 밝아오던 아침, 교실에서의 대면이 있고 나서부터였다. 공부가 손에 잡힐 리 없었다. 같은 페이지, 같은 문장만 벌써 몇 번을 읽고 있는 건지. 요 일주일간 최승현은 매일같이 학교에 나오고 있었다. 와서 하는 일이라고는 뒷자리에 앉아서 지용의 뒷통수를 노려보는 일 뿐이었지만. 그리고 지용은 그 일주일동안 꿈을 꾸지 않았다. 꾸지 않는 건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알 도리는 없었지만 일어나고 나서도 기억은 없었다.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것으로 지용은 안심했다. 학교에서도 필사적으로 피하고야 있었지만 꿈에서 만나버린다면 그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야, 너 최승현이랑 뭔 일 있었냐? 내가 등이 다 따가워."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아 그래도 저새낀 괜히 누구 잡아다 족치고 그런건 안한다고는 하는데- 눈빛이 존나 살벌해. 진짜 아무 일 없었어?" "내가, 쟤랑 말 한마디 한 적이 있어?" "쩝.......뭐 그건 아니다만."
왜 하필 최승현이었을까. 몇 번의 꿈으로 자신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제는 그 사실에 납득하고 있지만- 그렇다면 나는 최승현을 좋아하는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해 본 지용은 황급히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웃기는 소리. 분명 최승현은 봐줄만한 외모를 가지고 있을 지는 몰라도, 생각보다 괜찮은 놈일지는 몰라도, 그 이상은 아니었다. 겉으로 웃으며 대할 수는 있지만 속으로는 한없이 한심하다고 생각해왔던 부류에 속하는 녀석이다. 왜였을까. 그것은, 나의 꿈이었을까? 불려온 것은 그일까, 나일까.
고개를 슬쩍 돌려 뒤를 바라봤다. 여지없이 눈이 마주쳤다. 척추를 따라 쾌감을 닮은 서늘한 감각이 내달렸다. 무엇에 놀라기라도 한 듯 지용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가장 마지막으로 꿨던 그 꿈의 눈과 지독히도 닮아 있었다. 그 눈에 전부 보여졌고, 범해졌었다. 낙인이라도 찍은 것 처럼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버린 그 꿈이 잠시 눈을 마주친 것 만으로도 스멀스멀 떠오르기 시작했다. 울면서 그만두라고 해도 끈질기게 따라붙던 손.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몰아쳐져 쥐어짜내지듯이 몇 번이고 사정하고 사정했다. 순식간에 끄집어내진 꿈의 잔영은, 견고한 이성을 하나하나 부수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지키려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뭐가 그렇게 두려운 것일까.
그 뒤로는 지용은 등 뒤에 꽂히는 시선을 느끼면서도, 그 시선에 묘하게 반응하고 있는 자신을 알면서도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오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만큼- 권지용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
"젠장. 안나와?!"
애꿎은 벽을 주먹으로 내리쳐 봤지만 손만 아플 뿐이었다. 일주일째였다. 여태까지는 문을 열면 지용이 침대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일주일 째 문을 열어도 보이는 건 텅 빈 침대뿐이었다. 첫날은 좀 늦는건가- 하고선 기다리고 있었다. 둘째날은 엇갈리기라도 한건가 싶어 기다렸다. 하지만 일주일째였다. 어떤 수를 쓴 건지 몰라도 권지용은 의도적으로 자신을 피하고 있었다. 이제는 도저히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가 없었다. 벌떡 일어난 승현은 문을 열고 복도로 뛰쳐 나갔다. 길게 이어진 복도를 따라 수없이 많은 문이 있었다. 하나하나 다 열어서 뒤엎는 한이 있더라도, 찾아내겠어. 내 앞에 끄집어 낼 테다. 승현은 바로 옆에 있는 방 문을 거의 부수다시피 걷어차 열었다. 비슷한 느낌의 방이었지만 안에는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다음 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책장만 가득 차 있었다. 다음 문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계속해 문을 열었지만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계속 쌓여가는 분노에 지쳐 차라리 꿈에서 깨어나길 바라며 승현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문을 벌컥 열었다.
"안녕?" "..너..!!" "화내지 말고. 숨어버린 건 '내'가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고 입술을 매끄럽게 말아올려 웃는 건 승현이 여태껏 알고있던 권지용이 아니었다. 방도, 여태까지와는 전혀 달랐다. 푹신한 소파에, 커다란 침대와- 화려한 샹들리에. 만나면 두들겨 패 줄 거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물이라도 끼얹은 것 마냥 차갑게 식었다. 긴 소파 위에 늘어지듯 엎드려 있던 그는 푹신한 러그가 깔린 바닥을 맨발로 딛고 승현에게로 다가왔다. 가늘고 길게 뻗은 다리는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손가락이 승현의 손목에 가볍게 감겼다.
"들어와. 기다리다 지친 건 네가 아니라 나니까." ".......너, 누구야." "나? 나는- '널 만나고 싶어하는 나' 야."
승현이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리자 그는 소리높여 웃었다. 손목을 잡고 방 안으로 끌어당기고서는 목에 팔을 감았다.
"널 부른 건 '나' 고, 네가 지금 찾고 있는 건 유난히 겁도 많고 솔직하지 못한 '나' 야. 넌 원래 여기로 오게 되어 있었는데- 뭐가 잘못된 건지 그곳으로 가 버렸지 뭐야. 네가 여기로 왔으면 아무 문제 없이, 꿈에서 둘다 즐기고 깨끗하게 끝낼 수 있었을 텐데 말야." "너 다중인격이냐? 무슨 개소릴-" "아니, '나'는 나야. 사람이 종이 위에 그린 그림처럼 한 가지 면만 존재하는 건 아니잖아? 네 안에도 모순이라는 것 쯤은 존재하지 않아? 그런 거야. 네가 찾는 '나' 와 여기 널 만나고싶어하는 '나'라는 것은."
승현에게 이해할 시간을 주려는 듯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붉게 웃어 보였다.
"이해 못하겠으면 그냥 이해하지 않아도 돼. 세상에 꼭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일만 일어나는 건 아니니까."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전에 없이 달큰하다. 이것은 명백한 유혹이다. 승현은 뒷 머리가 쭈뼛하고 서는 느낌에 몸을 작게 뒤틀었다. 양 손으로 승현의 뺨을 감싸쥔 그는 눈을 휘며 웃었다. 분명, 그 '권지용'도 이렇게 웃었지만 여기 이 사람에게는 노골적인 색향이 묻어 있었다. 단지 욕구에 굶주려 달려드는 것이 아닌, 관능적이고 대담한- 그런 본능이. 닿은 것은 별다를 것도 없는 피부일 뿐인데 방 안의 공기는 이미 정사의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굳이 '그'를 찾을 필요가 있어? '그'는 널 두려워해."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 "쉬운 얘기야. '그'는 겁쟁이고, 욕심쟁이니까. 이 수많은 방에 차곡차곡 쌓아둔 자신의 것들을 포기하기는 싫지만, 그 방은 이제 지겨울 거야." "근데 왜 날 두려워한다는 거야." "출구는, 너니까. 뭐, 너라면 문을 열어주는 게 아니라 전부 때려 부숴서 나가게 해 줄 것 같지만. 그래서 널 불렀어."
부드럽고 폭신한 입술이 승현의 목덜미에 닿았다. 하지만 승현은 그 입술을 가르고 쏟아진 말들에 머리가 복잡해서 그런 유혹에 하나하나 가슴 설레여할 여유가 없었다. 젠장, 꿈 주제에 뭐가 이렇게 복잡한 거야. 승현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트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그는 작게 웃으며 머리칼을 다시 정돈해 주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져서 조금 멍해진 기분으로 승현은 그의 적극적인 애무를 받고 있었다. 어느새 그 손에 이끌려 소파 위에 누워 있었고, 그 위에 올라탄 그는 고양이처럼 허리를 숙이고 가슴팍에 입을 맞췄다. 승현이 별다른 반응이 없자 살짝 미간을 찌푸린 그는 승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거머쥐고 머리를 가깝게 끌어당겼다. 붉고 뜨거운 혀가 귓바퀴를 낼름 핥았다.
"너무 고민하지 마. 네가 깨어난 다음에 기억할 건 여기 이 '나' 도 나의 일부분이라는 거 하나뿐이니까. 꿈에서는 나뉘어 있지만 우리는 원래 하나. 너를 만나고 싶어하는 나도, 만나고싶어하지 않는 나도 결국은 하나야."
아, 그런 거군. 승현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한 '그'의 손목을 꽉 붙들었다. 할 마음 같은 건 저 멀리 사라져버린지 오래였다. 손목을 꽉 붙잡고 눈싸움이라도 하듯이 시선을 고정했다. 그는 피하지 않았다. 죽여버리고 싶어. 강렬한 충동이 머릿속을 가득 지배하고 있었다. 무엇으로부터 기인한 감정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승현이 이 순간 하고 싶은 건 몸과 몸을 섞는 행동이 아니었다. 이따금 이 꿈을 꿀 때 마다 그 가는 목을 졸라버리고 싶다는 기분에 휩싸이기는 했었지만 이 정도였던 적은 처음이었다. 무엇인가에 이끌려 승현은 손을 뻗어 목을 감싸쥐었다. 손아귀 아래에서 뜨겁게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가는 목은 힘을 조금만 더 주면 금세라도 부러질 것 같았다. 점점 더 손에 힘을 주자 그 팔딱임이 손에 선명하게 느껴졌다. 고통스러운지 발버둥치는 몸을 내리누르고 목을 졸랐다. 승현의 손과 팔을 마구 긁어내리던 손에 점점 힘이 빠졌다.
툭. 손이 떨구어지는 것과 동시에 승현은 잠에서 깨어났다. 두 손에 아직도 선명한 감각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악몽이라면 지독한 축에 속하는 꿈이었다. 땀에 흠뻑 젖어 이마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승현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던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4시 20분. 창 밖은 어슴프레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헉..!!"
무언가에 소스라치게 놀라 지용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꿈을 꾼 건가. 하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진 않았다. 볼이 건조하게 당겨오는 느낌에 손을 가져다 더듬어보니 말라붙은 눈물 자욱이 느껴졌다. 의아함에 베갯잇을 살펴보니 눈물에 젖은 듯 축축해져 있었다. 대체 무슨 꿈을 꿨던 것일까. 꿈에 나오는 최승현이 단지 상상의 산물만은 아니란 것을 깨달은 지금 기억나지 않는 꿈은 불안감을 키울 뿐이었다. 벽에 걸려있는 시계는 4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겠지만 지금은 다시 잠드는 게 두려웠다. 이러다 불면증이라도 걸리게 되면 어떡하지.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학교에 일찍 갈까. 잠시 생각해봤지만 저번에 이른 시간 학교에 갔다가 승현과 마주쳤던 일이 생각나 주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 복잡한 머리로는 책을 펴도 공부가 될 리도 없었고. 이리저리 뒤척이며 뭉기적대던 지용은 결국 침대에서 내려왔다. 설마 또 그런 식으로 마주칠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게 되뇌이며 계속해서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저도 모르는 사이에 지워내고 있었다.
지용이 일어나 씻고 돌아다니는 소리에 잠귀 밝은 지용의 어머니가 안방 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의 얼굴 위에 드러나 있는 것은 자신의 수면을 방해받은 것에 대한 명백한 짜증이었다. 시계를 한 번 쳐다본 그녀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졸리니까 밥은 알아서 챙겨먹으라는 말만 남기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새삼 별다를 것도 없는 반응이었기 때문에 지용은 냉장고 안의 차갑게 식은 반찬들로 적당히 아침을 때웠다. 언제나 자신의 일이 제일 소중했던 여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이 뒤쳐지는 것도 용납하지 못하는 여자였다. 한때는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받으려고, 칭찬을 받아 보려고 발버둥쳐봤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것 따위 포기한지 오래였다. 다만 이제는 그 짜증스런 목소리가 싫어 적당히 '평균 이상' 의 기대치를 채워주고 있을 뿐이었다. 꿈도, 의지도, 목표도. 이 손 안에는 없었다. 지독한 무기력감은 이미 자신의 일부였다.
조용히 신발을 신고 현관문 문고리를 잡은 지용은 잠시 멈춰섰다. 굳게 닫힌 방문에, 혹은 텅 비어있는 집에 대고 하는 무의미한 인사라 해도 꾸준히 해 왔던 자신이 갑자기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게 무슨 소용이었나. 그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 않아도 될 짓을 굳이 할 이유는 없으니까. 잠시 집 안을 돌아다보던 지용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여름이 성큼 다가온 아침날의 공기는, 더이상 서늘하지 않았다.
이른 아침의 학교는 지나칠 정도로 조용했다. 복도를 걸으면서 들리는 것은 자신의 발걸음 소리와 창문 너머 저 멀리 도로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가 전부였다. 문을 열고, 닫고- 책상을 빼서 앉기까지 자기가 내는 소음, 혹은 소리들이 너무나 잘 들려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시간은 5시. 간간히 이 시간에도 학교에 와 있는 녀석들이 있기는 했지만 확실히, 누군가 있을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지용은 책상 위에서 가방을 끌어내리고선 밤 동안 차갑게 식은 책상에 볼을 대고 엎드렸다. 지용의 자리에서는 창 밖으로 운동장이 훤히 내다보였다. 누가 오는지 볼까. 그런 생각을 하고서는 몸을 일으켜 창문턱에 몸을 기댔다. 맨 살갗에 닿아오는 시멘트가 차가웠다. 수위 아저씨가 한두번 왔다갔다 했고, 아침 운동을 하러 나온 사람들이 운동장 철봉에서 머무르다 갔다. 한 10분인가 그렇게 쳐다보고 있었을까. 교문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을 보고선 지용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 좋지 않은 시력이었다. 귀찮아서 안경을 쓰고 있지는 않았지만 저 거리의 사람이 확실하게 누군지 알아볼 만큼 양호한 시력은 아녔다. 하지만, 알 것 같았다. 말도 안돼. 지금은 거의 아무도 없는 시간이었고, 분명 최승현은 곧장 교실로 올라 올 터였고 그렇게 되면 또다시 둘이 마주치게 된다. 저번에는 여섯시 즈음이라도 됐었지, 지금은 다섯시가 조금 넘은 시각. 정말, 최승현인가. 알아볼 수 있을 거리가 되면 확인하고, 맞으면 피하자. 그렇게 생각한 지용은 잠시동안 창가에 붙어 서서 그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고개를 든 최승현과 지용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최승현도, 권지용도. 서로를 알아봤다. 그대로 운동장 어귀에 멈춰 선 최승현은 한참동안 지용을 올려다보다가 씨익 웃고선 거의 뛰듯이 학교 안으로 들어왔다. 시선의 주박이 풀리자마자, 지용은 황급히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여기 있으면 안돼. 열린 곳을 찾아야 했다. 대부분의 교실들은 지금 문이 잠겨 있었고, 섵불리 계단으로 움직였다간 마주칠 게 뻔했다.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이 이 상황은 위험하다고 끊임없이 경고해오고 있었다. 복도에서 좌우를 둘러보던 지용의 귀에 계단을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가깝다..! 교실만은 피해야 했다. 계단으로 올라가기엔 이미 늦었다. 부디 들키지 않길 바라며 지용은 화장실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가장 안쪽 칸으로 들어가 문에 붙어 서서 덜덜 떨고 있었다.
발소리가 들렸다. 화장실을 지나쳐 지용의 반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어젖히는 소리가 나고, 의자를 당기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지용은 화장실을 뛰쳐나왔다. 다른 곳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곧 그 생각을 뼈저리게 후회해야만 했다. 교실 문 바로 앞에 최승현이 있었다.
승현을 보자마자 이를 악물고 달리는 지용을 본 승현은 놓칠세라 뒤따라 뛰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이 풀리기라도 한 건지 지용은 몇번씩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그 때 마다 둘 사이의 간격은 성큼성큼 줄어들었다. 계단에 이르러 위쪽을 택하고 뛰는 지용의 뒷모습을 보고선 승현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제 무덤을 파는 꼴이 됐군. 조금 만 더 가까워지면 손을 뻗어 잡을 수 있었지만 승현은 그저 그 뒤를 바짝 쫓기만 했다. 그리고 결국 지용의 앞에 나타난 것은 굳게 닫힌 옥상문이었다.
"숨바꼭질은, 재미있었어?"
승현은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꺼냈다. 옥상 열쇠를 몰래 복사해 둔 게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은 몰랐지. 짤랑, 승현이 꺼내든 열쇠가 지용의 귓가에서 가볍게 흔들렸다. 옥상은 학생들에게 개방되는 장소가 아니었다. 도망칠 수 없다. 누가 와서 벗어나게 될 확률도 제로에 가깝다. 등을 돌린 채 문에 바짝 붙어있는 지용이 지금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 지 승현은 궁금해졌다. 승현의 신경을 자꾸 건드리는 존재. 그 겉껍질을 산산히 부수면 드러나는 것은 무엇일까. 바싹 다가서서 귓가에 나즉하게 속삭이자 몸이 흠칫 떨렸다. 귀와 목덜미가 예민한 게 꿈과 같았다.
"이건 꿈이 아냐, 권지용."
그리고 승현은 잠긴 옥상 문을 열고 밀어젖혔다. 문은 두 사람이 지나간 후에 다시 굳게 잠겼다. 어깨를 떠밀어 옥상 안으로 지용을 몰아넣은 승현은 이내 그 머리칼을 휘어잡고 물어뜯듯이 입을 맞췄다. 어깨를 밀어내려는 손은 붙잡혀 머리 위로 내리눌러졌다. 다리도 버둥거려봤지만 허벅지가 무릎으로 눌린 뒤에는 별 수가 없었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입술을 피했다. 계속된 거부에 짜증이 난 듯 승현이 몸을 일으켰다.
"왜, 하던 것 처럼 다리 벌리고 안겨봐. 싫어?" "그건, 꿈이잖아..!!" "그래서, 다른 게 뭔데? 너 말야, 날 피하고 싶으면 피할 수 있는 거였더라? 이번처럼. 여태껏 잘도 안겨놓고선 실제로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까 싫어?"
그르렁대듯 낮은 목소리로 내뱉은 승현은 손으로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꿈에서도 유난히 민감해서 등을 쓸어주면 길게 신음하며 몸을 뒤틀곤 했었다. 그리고, 역시 같은 반응이었다. 지용도 자신이 꿈과 같이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붉게 물든 얼굴에 드러난 것은 다름아닌 당혹감과 두려움이었다. 승현은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무엇을 봐도 꿈과 같은데 자기만 끝까지 아니라고 거부하는 모습이 우스웠다.
"같은 곳을 느끼고 있잖아, 너. 알아? 귀를 깨물어도,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어줘도 좋아했지. 구멍 안쪽도 똑같지 않겠냐? 몇번이나 박아댔던 곳인데,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아?" "이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야...!! 단지 꿈일 뿐이라고, 그건..!!" "내가 열받거든. 꿈도 정도껏이란 생각은 안 해? 우린 진짜로 섹스했던 거나 다를 바가 없어. 실제로 한다고 뭐가 더 달라져?" "싫어... 안 돼..!! 난, 난-" "겁쟁이. 뭐가 그렇게 무서워? 아-."
자조적으로 웃은 승현은 지용의 볼을 톡톡 두드리다 아플 정도로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작은 비명이 터져나왔지만 승현은 아랑곳않고 손아귀에 힘을 더 주었다.
"정상이 아니게 되는 게 그렇게 싫어? 인정하기 싫은거지? 남자에게, 그것도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자식에게 발정하는 너를!!" "큭- 흐으, 무슨-.." "모를 거라고 생각했냐? 꿈에선 달콤한 말을 지껄이고 다리를 벌리는 주제에 넌 항상 날 경멸하는 눈으로 쳐다봤잖아. 처음엔 나도 너한테 관심 따위 없었으니까 상관하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거든."
승현이 쏟아내는 말들에 지용은 왠지 정신이 아득해져감을 느꼈다. 목을 죄어오던 손은 이미 없어졌지만 다른 의미로 숨이 턱턱 막혀왔다. 저항할 의지마저도 잃은 채 지용은 승현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최승현도 무엇인가에 지독하게 쫓기고 있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는 걸. 그를 뒤쫓고 있는 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저런 표정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이 저런 모습을 하고 있었을 테니까.
무섭지 않다. 아마 그런 것 같다고 지용은 생각했다.
"도망치면 쫓아가 주겠어. 널 깨부숴서라도 끌어낼 거야. 날, 제대로 보게 할 거라고."
굶주린 것 처럼 달려드는 승현을 더이상 밀어내지 않았다. 익숙한 열기에 휩싸여 몽롱해진 정신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너무나 넓었다. 아, 그런 거였구나. 지용은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던 팔을 들어 승현의 어깨를 꽉 안았다. 그것은 꿈에서 몇 번이고 끌어안았던 어깨였다. 달려들던 승현의 움직임이 잦아들었고, 눈이 마주쳤다. 지용은 승현의 얼굴을 끌어당겨 키스하고는 작게 속삭였다. 어느 초여름날, 새벽과 아침의 경계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시선이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아니, 주목하지 않게 되는 게 더 이상했다. 그만큼 최승현은 눈에 띄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아직은 거친 얼굴선은 곧 어른이 되면 그 날카롭게 정리될 것이었다. 맨 뒷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심드렁한 얼굴로 창 밖을 바라보거나 엎드려 자기만 하는 게 학교에 뜸하게 나와서 하는 일의 전부였다. 그리고 권지용은 그런 최승현이 썩 달갑지많은 않았다. 분명 화려해 보이고 제 하고싶은 대로 하고 있는 게 어린 마음에는 멋져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자신은 성숙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졸업을 하게 되면 결국 별 것 아닌 인생을 살 게 뻔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주 뛰어난 것은 아녔지만 지용은 나름대로 착실하게 주변의 요구에 맞춰서, 열심히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일도, 하고싶은 것도 있었고 부모님과 선생님의 기대를 저버리기도 싫었으며 친구들에게 사교성 좋고 성실하다는 평가를 듣는 게 좋기 때문도 있었다.
분명 한심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지켜보고 있었다. 행동 하나를 눈으로 좇고 있었다. 그렇게 지켜보면서, 지용의 마음 한구석에는 묘한 기분이 조금씩 움트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질투였고, 박탈감이었다.
"요번에 보니까 성적이 좀 떨어졌던데. 다음엔 잘 해봐." "네. 안녕히 계세요." "아참, 오늘도 최승현은 결석이냐?" "아뇨- 2교시에 오긴 했지만요." "그러냐. 요즘은 학교에 오기는 하는구나. 그래, 올라가 봐라- 오늘 종례는 내가 못하니까 네가 적당히 알아서 잘 끝내고."
싹싹하고 예의바르고 성실한 3반 반장. 조금 더 노력한다면 최상위권 대학을 노려볼 만한 성적. 그런 평가들이 싫지 않았으니 기꺼이 받아들인 짐들이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주어진 기대감도, 의무감도, 책임감도. 하지만 요즘 들어서 그런 짐들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최승현 때문인가. 지용이라고 매일이 즐겁고 좋아서 아침 일찍 일어나 늦지 않게 학교에 오고 졸음을 참아가며 수업을 듣는 게 아녔다. 목표하는 바가 있다지만 그것과 이건 별개였다. 싫은 건 싫은 것, 힘든 건 힘든 것이니까. 깨달아가면 깨달을수록 지용은 어딘가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억지로 눌러놓은 모든 욕구들이 이때라는 듯이 깨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용이 도무지 알 수 없는 기묘한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눈 앞이 무언가에 가려진 듯 어두웠다. 제대로 몸을 가눌 수도 없었다. 그저 늘어진 채로 신음하고 있을 뿐이었다. 해방되지 않는 몸 속의 열기는 정신을 마음대로 휘저어 놓았다. 고통스럽기만 했다. 전신을 뛰노는 열기에 울면서 가슴팍을 몇 번이나 긁어내려도 방법이 없었다. 그런 의미 없고 영문 모를 꿈이 몇번이나 계속되었다. 깨어나면 온 몸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가끔은 울기라도 한 것 처럼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꿈에는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 막연하게 느끼고 있었다. 뜨거운 몸에 서늘한 손이 닿으면 그게 너무나 기분 좋아서 정신없이 매달렸다는 기억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으레 거의 모든 꿈이 그렇듯이 일어나서 학교 갈 즈음이 되면 그 꿈은 기억에서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그러나 한번,두번 반복해감에 따라 꿈은 또다시 변화하고 있었다.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열은 점점 식어 서서히 눈 앞이 보였다. 지용은 꿈 속의 상대가 누구인지, 자신이 꿈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천천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 역시도 아침이 되면 희끄무레하게 지워져 갔지만 자신의 꿈에 승현이 나오고,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기억에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실제로 속옷에 남은 흔적이 제일 충격이었지만 그 때 지용은 깨달았다. 자신은 남자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왜 남들이 다 하는 몽정이 자신에겐 제대로 찾아오지 않았으며 여태껏 그리 성적인 것들에 담백했었는지. 그 모든 것의 답이었다.
요즘들어서 잠이 쏟아지는 것을 참을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아침에 꿈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라듯 일어나는 것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깊게 잠에 들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안그래도 졸린데 앞에서 수업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졸리면 그거야말로 쥐약이었다. 만만한 선생님이면 요령껏 졸겠지만 지금 앞에서 위협적으로 회초리를 휘둘러 가며 자습서 그대로 칠판에 베껴 적고 있는 영어 독해 선생은 조는 걸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게다가 한번 찍히면 1년 내내 고생한다. 이유 없이 때리고 괜한 트집을 잡아 벌주기 일쑤였으니까. 그래서 수업을 진심으로 듣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수업 시간에는 모두가 깨어 있었다. 제멋대로 구는 반의 몇몇들도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긴 하지만 적어도 엎드리지는 않았다. 흔히 말하는 '노는'학생이 걸릴 수록 더 악랄해지는 저 사람의 성격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름 예쁨 받고 있는 지용이라지만 그래도 마음 놓고 졸 수는 없었다. 허벅지를 꼬집어 가며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올리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서 버럭 소리를 질러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너!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게 뭐야. 일어나." "아...아무것도 없었는데요." "내가 똑똑히 봤는데 시치미 떼는거냐? 이 새끼가 돌았구만? 당장 숨긴 거 내놔. 핸드폰이야, 만화책이야? 어?" "정말 아무것도 안했어ㅇ-악!!" "너 이 새끼. 너 지금 날 우습게 아냐?"
거칠게 내려친 손바닥에 고개가 확 돌아가는 게 보였다. 계속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서 항변하는 목소리를 묵살하고 그 선생은 머리통만 후려치기 시작했다. 다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지용도, 그리고 그 주변에 있던 몇몇도 정말로 그 친구가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안된 일이지만 대신 나서서 말해줄 수는 없었다. 불똥이 자신에게 튈까 무서웠기 때문이다. 저 선생의 하는 작태가 너무나도 아니꼽고 화가 나지만 그것과 자신의 안위는 별개였으니까.
"이 새끼가 그래도-" "저기요."
낮고 거친 목소리가 일방적인 구타를 비집고 들어섰다. 그 목소리에 선생은 때리던 손을 멈추고 목소리가 나온 쪽을 휙 돌아봤다. 최승현이 손을 반쯤 들어올리고 있었다. 다들 그걸 보고 숨을 헉 하고 들이켰다. 안그래도 저 선생은 최승현을 마음에 안 들어하고 있었다. 이걸 빌미로 더 미쳐 날뛸 지도 모른다. 그냥 가만히 있지 왜 끼어들고 지랄이냐, 지랄이. 수근거리는 목소리가 조용히 퍼져 나갔다. 하지만 지용은 뻣뻣하게 굳어서 승현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걔 진짜 아무것도 안했거든요. 엄한 애 패지 말고 수업 마저 하시죠." "너, 지금 말투가 그게 뭐냐?" "트집 잡으실 거면 그냥 차라리 복도로 내쫓던가요." "..........당장 나가. 그리고 수업 끝나면 따라서 교무실로 와. 그리고 너 이 새끼. 오늘은 그냥 넘어가는데 다음 한번 더 걸리면 그때는 정말 뒈지는 줄 알아."
선생의 말이 끝나자마자 최승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복도로 나가 버렸다. 그리고 수업이 끝났을 즈음에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아마도 본인은 그저 수업 듣기가 지루하고 짜증나서 적당히 기회를 봐 나간 것일지도 모르지만, 최승현은 그 일로 은근한 인기를 얻었다. 괜히 나선다는 평가도 꽤 있었지만 그래도 끝은 으레 뭐, 그래도 좀 폼나긴 하더만- 으로 맺어졌다.
"야, 진짜 장난 아니지 않았냐. 나같으면 무서워서 대들 생각도 못한다." "대든 게 잘한 건 아니잖아." "그래도- 와씨. 그냥 인생 포기하고 막 사는 놈인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봐." ".......뭐."
그게 왜 그렇게 연결되는 거냐, 라는 말 같은 건 안으로 꾹꾹 밀어넣었다. 하지만 자신도 그 생각에 동조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아니라고 말은 해도, 자신은 느껴버렸다. 저런 건 멋진 게 아니라 괜한 개폼이라고 학습받아 왔고 그렇게 생각해 왔었지만, 결국은 자기도 저런 식으로 한번쯤은 행동하고 싶었던 거였다. 저건 바보같은 짓이라며 차갑게 식어있는 머리와 흥분으로 들떠있는 가슴은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며 엇나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뭐가 옳은 건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날의 꿈은 다른 날보다 조금 더 격렬했다. 지용은 이제, 빼도박도 못하게 자신의 꿈을 인식하고, 인정해야만 했다. 단편적으로만 남아있던 꿈들은 이제 점점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가끔은 꿈 속에서 입술이 닿았던 자리가, 정말 닿기라도 한 것처럼 화끈거려 오기도 했다. 무엇보다. 꿈 속의 최승현이- 실제의 너도 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냐, 라고 몇 번을 물어오자 정말 의심이 들었다.
이것은 꿈일까.
"이건 꿈이야."
그렇게 최승현의 귀에 속삭이면서 지용은 좀 더 대담하게 다리를 벌려 승현을 끌어당겼다. 승현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것은 헛된 꿈을 꾸고 있는 자신에게 하는 말. 요즘 가끔씩 닿아 오는 승현의 시선에 이게 설마 꿈이 아녔던 걸까, 하고 헛된 상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다잡기 위한 말이었다. 꿈이 깨고 나면 대부분의 것들은 흐릿해지겠지만 그래도- 꿈 속의 지용은 지용이 아니었다. 마치 처음부터 다른 인격이었던 것 마냥 웃음을 흘리고 쾌락에 겨워 허덕여하며 부끄럼도 잊은 채 욕구에 충실했다. 고통에 섞여드는 미묘한 이질감이 온몸을 뒤흔드는 열기로 바뀌는 그 순간이 너무나 좋았다. 제 맘대로 지용의 몸을 다루는 승현의 서늘한 손길이 좋았다. 그 큰 손으로 등을 쓸어오고 허벅지를 문질러 오면 지용은 가늘게 울며 신음했다. 꿈이라고 계속 웅얼대는 지용에게 화라도 난 것인지 승현은 평소의 꿈보다 거칠었다. 대뜸 우악스럽게 다리를 벌려 몸 쪽으로 밀어붙이고 질러들어왔다. 무리하게 접힌 허리가 아프고 눈 앞에 드러나버린 접합부에 수치심마저 일었지만 동시에 밀려드는 포만감과 등골을 달리는 쾌감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게 되었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아서 허우적거리다가 시트를 잔뜩 틀어쥐고 울었다.
"하아, 악- 아흑...아..아아-" ".....하.......꿈이라고-"
분명 지금 승현은 화가 나서 거칠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런 행동들은 지용의 흥분을 부추기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지용은 발정난 고양이마냥 흐느끼며 승현을 먹어치울 듯한 기세로 안겨들었다. 콱콱 박혀드는 것이 머리까지 난잡하게 뒤흔들어 놓는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미쳐버리고 말 거야. 아니, 이미 얄팍한 이성은 무너질 대로 무너져 있었다. 다른 때보다 더 강렬하게 갈구하고 있었다. 시선을 느끼고 있었지만 바라보고 있는 눈과 돌아보는 눈이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지용은 그 때 평소처럼 웃어 보일 수 없었다. 그 짙은 눈이, 명확하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발 끝에서부터 기묘한 감각이 치달아 올라왔기 때문에. 그리고 그 시선에 꼴사납게도 흥분해 버렸다.
"...흐.....그럼....이게 꿈이 아니면-아흐으으-" "웃기지마......이런, 꿈은- 들어본 적도 없어.... 시치미 뗴지 마. 꿈에서는 이렇게...놀아도-..... 진짜는 싫다 이거야?" "하......하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꿈이 아닌 현실에서-라니. 그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이런 일탈은 꿈이기 때문에 허용되는 일이었지 그게 현실이 되는 건 상상할 수 조차 없었다. 안돼, 이 이상은- 어딘가 다급해진 지용의 몸은 급속히 식었다. 아직도 달려드는 승현에게서 도망치려 필사적으로 침대 위쪽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승현의 손이 먼저 지용의 머리채를 잡고 시트에 짓눌렀다. 허리를 꽉 붙들고 다시 삽입한 승현은 정말로 지용의 사정 같은 건 봐주지 않고 마구 몰아쳐대기 시작했다.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이대로 꿰뚫려 두 조각이 나는 건 아닐까. 깊숙한 곳에 자신을 밀어넣으며 승현은 지용의 귓가에 으르렁대듯 말했다. 그 목소리에 지용은 또 다시 파드득 몸을 떨었다.
"그렇다면.........억지로라도,끌어내야지."
무언가가, 크게 어긋나 버리기 시작했다. 억지로 끌어올려진 쾌감의 정점에서 지용은 화들짝 놀라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그날의 꿈은, 여태까지의 그 어느 꿈보다도 선명하고 생생했다. 닿았던 자리들마저 화끈거려올 정도로.
"........누구 덕분에, 나도 존나 뭣같은 꿈을 꿨거든?"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승현의 시선은 어젯밤 꿈에서 봤던 것과 너무나 똑같았다. 승현이 한 걸음 다가서자 지용은 뒤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금세 등이 벽에 부딪혔다. 퇴로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궁지에 몰린 초식동물처럼 잔뜩 털을 곤두세우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리 싱숭생숭했어도 학교에 일찍 오진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최승현이, 이런 시간에 학교에 올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지용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억지로라도 끌어내겠다는 그 말을. 그리고 그것은 지용의 세계를 산산히 부숴 버릴 것이 분명한 일들에 대한 경고이자 예고였다. 쌓아왔던 가치관부터 권지용이라는 인간 자체까지, 모두 다.
"나 혼자 잠 설치는 건 너무 억울하잖아. 그런데 보니까 그건 아닌 것 같네." "그-"
그게 무슨 말이냐고, 억지로 웃음이라도 지어보이려던 시도는 문을 거칠게 밀고 들어온 반 친구에 의해 무산됐다. 날카롭게 쏘아보던 눈이 거두어지자 지용은 숨통이 트인 듯 크게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말도 안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상식적으로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군가와 같은 꿈을 꾸고 있다니. 지용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서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렇다면 최승현의 그 말들은 대체 뭐지. 불안감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래서는 안되는데. 대체 어디서부터가 꿈이고 어디서부터가 현실인지 잘 모르겠다. 모든게 머릿속에서 뒤엉킨 기분에 한숨이 쏟아졌다.
최승현이 두려웠다. 이건 아니라는 말만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렇게 지용은, 모든 의구심과 호기심을 마음 깊은 곳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그것은 자신의 다른 모든 것들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발악이었다.
숨이 가쁘다. 어지럽다. 몸 안을 날뛰는 열기에 정신마저 혼미해지는 그런 아련한 고통이었다. 승현에게 있어 권지용을 떠올린다는 것은 그런 일이었다. 상상만으로 몇 번이고 울리고, 끌어안고, 범하고, 범하고, 범하고. 온몸에 피어오른 열에 신음하며 우는 지용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치사량의 극독이었다. 눈에 어린 물기가 요사스러울 정도로 빛을 담고 반짝였다. 지용은 이미 승현에게 있어, 꿈 속의 마돈나였다.
얼마 전 까지만 하더라도, 승현에게 있어 지용은 단지 같은 반 녀석일 뿐이었다. 노는 패들도 완전히 달랐고 성적부터 품행까지 접점이라곤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용이 난데없이 승현의 꿈에 나타나기 전 까지는- 승현은 지용에게 별다른 관심은 없었다. 기묘한 꿈이었다. 어딘가 묘하게 틀어진 그 현실감. 마르고 새하얀 나신은 홀로 신음하고 있었다. 너무나 생생했다. 꿈에서 으레 느껴지는 미묘한 속도감이나 통제 불능의 자신은 그곳에 없었다. 얼마든지 뒤돌아서 다른 곳으로 나갈 수도 있었다. 그런 꿈이었다. 하지만 손을 대버렸다. 그리고 그에 화답해 지용의 몸도 활짝 열렸다. 땀에 젖은 살결이 달라붙는 그 느낌까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생생했다. 꿈에서 지용은 처녀처럼 아파했고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다가도 과감하게 다리를 벌리곤 매달려왔다. 정신없는 열락의 꿈. 깨어나고 나서 승현을 맞이한 것은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던 그 황량한 방이 아닌, 몇 번이고 본 천장과 잔뜩 젖어버린 속옷 뿐이었다.
"...미치겠다...."
바라본 시계는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일어나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하지만 승현은 자신이 곤란하지 않도록 일찍 깨워주는 이 꿈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벌써 몇번째일까, 이 꿈. 처음 한 번은 개꿈이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 다음번엔 내가 이 정도로 궁했던 건가 하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제는 세는 것 조차 포기했다. 그 사이에 꿈 속의 지용은 승현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이름을 불러오기 시작했다. 나누는 것은 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간간히,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것은 정사 도중이기도 했고, 한 번의 열락 뒤에 식힌 몸을 다시 달구는 과정에서이기도 했다. 정말 사소한 이야기들이었다. 이게 꿈이 맞을까? 아마도 꿈이겠지. 너도 꿈을 꾸고 있어? 어느 날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서 계속 이야기만 했던 날도 있었다. 이래서야, 정말- 권지용과 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제는 그게 꿈인지조차 의심되곤 했다. 기묘하지만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현실감이 이게 단순한 꿈은 아니란 걸 계속 승현에게 알려오고 있었으니까. 혹시 내게 몽유병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승현은, 정말 진심으로 고민했다.
하지만 이게 꿈이 아닐 리 없었다. 승현으로서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다리를 벌려오며 잠깐씩이지만 닳아빠진 창녀같은 모습을 내보이는 권지용과, 그저 활달하고 사교성 좋은 반장일 뿐인 녀석이 같은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맨 뒷자리에 늘어지듯 앉아 있던 승현은 고개를 돌려 교실 한편에서 왁자하게 떠들고 있는 무리 속의 권지용을 바라봤다. 하얀 와이셔츠가 잘 어울린다. 마냥, 어려 보인다. 왜 하필이면 권지용이었을까. 그런 모습으로 나오는 게 다른 누구도 아닌 권지용인 이유가 무엇일까.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래, 뭐라고 해야 할까- 승현은 적당한 말을 찾기 위해 잠깐 고민했다. 굳이 말하자면 꿈에서의 그는 붉은 느낌이었다. 붉고,붉어서 닿으면 손 끝마저 새빨갛게 젖어 버릴 것 같은 그런 느낌. 하지만 저기서 이를 활짝 드러내며 웃는 저 모습은 그저 하얗고, 하얗기만 했다. 흠 없고 구김 없는 그런 느낌. 저런 권지용이 그럴리가.
하지만 승현은 얼마 있지 않아 쉽게 단정내버린 자신을 비웃어야만 했다. 의자에 구부정하게 앉아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지용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승현은 그 고개가 천천히 돌아 자신을 바라보는 걸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웃음으로 가늘게 휘어져 있던 눈이 천천히 식어 푸르고 냉한 기운을 띄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심장이 내려앉는다. 승현과 눈이 마주치고서도 지용은 눈을 돌리지 않았다. 하얗다고? 저건 하얀 게 아니다. 승현은 자신의 부족한 어휘로는 '저것'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붉지 않았다. 하지만-
승현은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순간 차갑게 식었던 피가 이전보다 더 높은 온도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입안이 바짝 마른다. 그는 이제 고개를 돌려버려 이쪽을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푸르게 남은 잔상은 승현의 가슴을 쿡쿡 찔러댔다.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은 흥미와 관심, 그리고 욕구였다. 어째서인지 승현은 그게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기 시작했다. 뭐가 됐던, 그 꿈은 진짜다. 그러니까 그걸 끄집어 내고 싶었다. 새하얗고 어린 동물의 가죽을 뒤집어쓴 저 권지용에게서 그 모습을 억지로라도 끌어 낼 생각이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여전히 꿈 속의 풍경은 지독하게 황량했다. 침대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방.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밝혀진 조명과 어둠에 젖어 본래 색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벽과 천장. 매번 승현의 꿈은 그 방의 작은 문 앞에서 시작했다. 뒤로는 길고 긴 복도가 놓여 있었고, 그 복도를 따라서 문도 늘어서 있었다. 이 문만 있는 것이 아녔다. 다른 문으로도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승현은 결국 매번 이 곳을 선택했다. 창문 같은 건 없는데도 어디선가 스며드는 한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침대 위에, 권지용이 앉아 있었다.
"안녕." "오늘은 평소보다 좀 늦었네." "아아. 잠을 늦게 잤으니까."
눈을 휘며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낮의, 학교에서의 미소와는 근본부터가 달랐다. 가느름한 눈에는 항상 물기가 어린 듯 빛이 머물었다. 사람을 홀리는 얼굴이다. 뛰어나게 아름다운 얼굴은 아니었다. 그냥 단순히 '예쁜' 남자라면 승현의 주위에도 지겹게 많았다. 그것보다 하반신 욕구를 더 자극하는 여자들도 많았다. 그렇지만 왠지 구미가 당겼다. 처음부터 그랬다. 승현인 줄 모르고 그저 급하게 매달려왔던 그 때에도 단순한 흥미만은 아녔다.
"너 말야."
승현은 지용의 목을 한 손으로 살짝 쥐었다. 엄지손가락이 닿은 부분 아래에서 콩콩거리며 맥이 뛰는 게 느껴졌다.
"정말, 꿈이야? 아니면 내가 아는 그 권지용이야?" "글쎄. 너는 뭐라고 생각하는데?" "잘 모르겠지만- 여기서 네 목을 졸라 죽여버린다면 진짜 너도 죽는걸까."
승현을 올려다보는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작은 입술이 달싹였다. 알고 싶으면, 해봐. 하지만 승현은 그 말에 손에 힘을 빼버렸다.
"그랬다가 진짜 뒈지면 찜찜할테니까 싫어. 그러지 말고 네가 좀 얘기해보지 그래? 너는 뭔가 알고 있어? 진짜 너도 매일 밤 나를 만나고 있는 거야?" "이건 네 꿈이야." "그래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결국은 꿈이라는 거지."
영악하다. 이야기는 둘 다 알고 있는 사실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승현은 조금 작전을 바꿔 보기로 마음먹었다. 머리가 핑핑 도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뭔갈 위해 머리를 써본 적은 거의 없지만 나름대로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원하는 걸 얻어내는 방법 정도는 체득하고 있었다. 푹신한 침대 위로 올라타며 어깨를 밀어 뒤로 눕혔다. 그 눈은 오늘 학교에서와 같이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지만 담겨있는 것은 푸르고 냉한 것이 아닌 뜨겁고, 붉고, 진득한 것이었다. 턱을 붙들고 입을 맞췄다. 얽혀오는 혀가 너무나 익숙했다. 권지용의 몸은 항상 뜨거웠다. 그 안에 무슨 열기를 그렇게 가둬두고 있는 것인지.
"말해봐." ".....하아.뭘?" "너에 대해서. 어차피 꿈일 테니까 내 맘대로 생각한 내용 아니겠어?"
몇 번이고 몸을 섞으며 알게 된 민감한 부분들을 자극하자 더운 숨이 흩어졌다. 하아, 하고 내뱉는 숨에는 명백한 웃음이 섞여들어 있었다. 그가 손을 뻗어 승현의 머리카락을 살짝 움켜쥐었다. 나는 말야, 작은 헐떡임이 섞여 있었지만 그는 입을 열어 이야기를 계속해나갔다. 승현은 혼잣말 같은 그 웅얼거림을 들으며 마르고 하얀 몸을 마음대로 열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승현의 손에 익숙해진 그 몸은 한 곳을 자극하면 이어질 자극에 먼저 기대하고 흥분해 있었다.
나는- 전부터.. 널 보고 있었어. 너는 제법 눈에 띄니까 말야. 생긴것도- 하는 짓도. 열기로 혼곤한 와중에도 그는 계속해서 말을 잇고 있었다. 그래서 멋대로 상상하고 있었어. 네가 꽤나 맘대로 놀고 있다는 건 웬만한 애들은 아니까. 남자라도 거절하지 않잖아- 너는. 그리고, 나는 남자를 좋아해. 섹시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안겨도 좋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는 하얗게 웃었다. 도저히 모를 놈이라고, 승현은 생각했다.
"내 꿈이라서, 내 맘대로 생각한 내용 치고는 너무 자세한 거 아냐?" "그렇지만 내일 나는 이런 일 같은 거, 전혀 모르는 사람일 텐데 말야." "확인해 보도록 할까." "아니, 이건 꿈이야."
승현의 얼굴을 양 손으로 붙잡아 키스하며 지용은 다시 한번 더 속삭였다. 이건 꿈이야. 어느 쪽이 원해서 꾸는 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꿈이야. 꿈은 꿈으로 끝인거야.
꿈은 꿈으로 끝이라고? 승현은 잠에서 깨어나 알 수 없는 화에 시달려야만 했다. 평소였다면 어제 속에 들이부은 술 때문에 지금 시간에 깨어나지도 못했을 터였다. 학교를 나간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테고. 하지만 승현은 지금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느낌이던 뭐던, 학교에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얼굴을 보고, 시치미 떼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꿈은 꿈이라고? 이런 꿈은 듣도보도 못했다. 꿈일 리가 없었다. 나 혼자 착각하고 있는 거라고 꿈 속의 권지용은 계속 말해왔지만 나는 그걸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꿈이라고. 이런 게 꿈이라면 잠 따위 자고싶지 않았다. 속이 쓰려 당장에라도 위 속에 든 모든 것을 게워내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승현은 고집스레 학교로 향했다. 요즘들어 제 시간에 등교하는 승현을 보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내심 놀란 얼굴들이었지만 지금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당장에라도 멱살을 틀어쥐고 그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 집어 치우라고 하고 싶었다.
분명 속으로는 자신이 미쳐버린 게 아닐까, 하는 자각은 있었다. 이게 꿈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도 없었고 단순한 과대망상일 수도 있다는 것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건 그거대로 화가 나는 일이었고,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한다면 지금 끓어오르는 이 열을 주체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불공평해. 불공평하다, 이건. 욱하고 치밀어오르는 것을 꾹꾹 누르며 교실 문을 열어젖혔다. 생각보다 이른 시간이었어서, 교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문은 열려 있었다. 누군가 먼저 왔다는 소리다. 교실 안을 둘러보던 승현은 지용의 자리에서 가방을 발견했다. 그리고 뒤이어 닫혀있던 교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세수라도 한 건지 얼굴과 머리카락 끝이 젖은 채인 권지용이 문가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 "...이 시간에 오냐?" "잠을 설치는 바람에. 그나저나.. 너도 이런 시간에 학교에 와?"
승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있는대로 말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자신에게 남아있는 한 조각의 이성이 그걸 끝까지 잡아 누르고 있었다. 자연히 이가 악물려졌다.
권지용의 입가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승현은 한 발짝 내딛었고, 그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승현이 다시 한 발 다가섰지만 그에게는 더이상 뒤로 물러날 공간이 없었다. 당장에라도 손을 뻗어 저 목을 틀어쥐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옷깃으로 가려진 곳 아래에 어제 자신이 남긴 자욱이 선명하게 남아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승현이었다.
"나 혼자 잠 설치는 건 너무 억울하잖아. 그런데 보니까 그건 아닌 것 같네." "그-
지용은, 그 말에 뭐라고 대답하려 했지만 닫혀있던 문을 쾅 하고 열어젖힌 누군가에 의해 팽팽하던 긴장이 순식간에 허물어져 버렸다. 씨발. 승현은 낮게 욕을 내뱉고는 열린 문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그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고 있던 지용은 눈을 감아버렸다.
------------------- 짧게짧게 3편 연작으로 갈 겁니당. 담편은 지용이 시점 위주.
나는 여기에 있어. 아아, 너와 나를 갈라놓는 이 차가운 벽을 산산히 조각내고 싶어. 너를 만지고 싶어. 너에게 닿고 싶어. 그녀는 거의 항상 무표정했다. 이따금 고뇌에 찬 듯 미간을 찌푸릴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 둥근 눈썹과 이마, 아무것도 담지 않은 듯, 또 모든 것을 담을 듯한 눈. 매끄러운 콧잔등. 붉고 도톰한 입술. 사랑스럽고, 사랑스럽다. 나의 여인. 그녀를 향한 나의 사랑은 언제나 지고지순했다. 그 고귀한 얼굴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나는 그녀를 동경했다. 그녀가 무엇인지는 내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따금씩 지어주는 그 희미한 미소에 나는 위안을 찾았다. 갸름한 눈이 반달같이 휘어지고 붉은 입술 새로 흰 의가 드러나 빛나는 그 찰나의 순간에서. 나는 그녀가 자라는 것을 주욱 지켜봐왔었다. 얼마 전까지 그녀는 막 솟아오른 가슴이 봉긋한 소녀였다. 소녀가 처녀가 되어가는 그 모습은 얼마나 신비로운지. 통통했던 볼이 갸름해지고 팔다리는 길고 날씬해졌으며 허리는 유려한 곡선을 그렸다. 그녀의 몸은 점점 어머니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풋사과는 빨갛게 익어 달큰한 향내를 풍겼다. 그녀 역시도 달콤했다. 나는 항상 침을 삼켜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는 닿을 수 없었다. 나 같은 것이 닿는다면 그녀는 더러워지고 말아. 나는 그녀의 처녀를 지켜야만 했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탐낼 수많은 정욕들로부터 그녀의 싱그러움을 지켜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침울했다. 나는 그녀의 미소 한 번을 보기 위해 기나긴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었다. 손을 뻗어봤자 닿은 건 차갑디 차가운 유리벽이었지만 나는 항상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었다. 그렇게 한다면 그녀가 봄눈 녹듯이 내게 웃어줄 것만 같았기 때문에. 하지만 그 내 작은 시도가 좌절될 때 마다 그녀는 수심에 가득찬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체념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조차 이곳에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 모양만으로도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안녕, 사랑해, 안돼. 내가 하고 있는 말은 그녀에게 전해지고 있는 걸까? 알 수 없었다. 다만 가 닿기를 바랄 뿐이었다. 내가 여기에 있어. 나는 너를 사랑해. 너는 아름다워. 내가 말을 걸 때마다 그녀는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다. 가끔은 웃어주기도 했고, 가끔은 화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매번 무표정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나에게 반응을 보여주었던 그 날을 나는 잊지 못할 것이다. 기뻐하는 나를 보며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그런 웃음을 자주 지어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가 웃어주는 건 나밖에 없었다. 다른 누구도 그녀의 그런 아름다움을 알지 못했다. 이미 그녀는 나 자신이었다. 그녀의 희노애락, 모두 나의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육체 외의 모든 것을 온전히 소유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자명한 사실이었고, 또 언제까지나 그래야만 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도 그렇기를, 그렇게 되기를 원하고 있다는 걸. 언젠가 이 벽이 무너지고 진정으로 우리가 하나가 되는 날을. 정신과 정신, 그리고 육체와 육체의 결합. 그건 저 추잡한 짐승들의 성교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숭고한 행위였다. 우리의 결합. 그녀는 나를 온전히 흡수할 것이다. 그 절대적인 아름다움은 내 저속함을 충분히 정화시키고도 남을 것이리라. 나의 고뇌를 잠재우고 내게 위안이 되어줄 그녀. 내가 살아온 시간은 언젠가 찾아올 그 결합의 날을 위한 것들이었다. 내 인생은 그 순간을 위해 예정되어있던 것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그녀를 지키고, 또 지키면 되었다. 더러운 세상으로부터. 하지만 나는, 가끔 그녀를 내 오감으로 직접 느끼고 싶다는 욕구에 휩싸이고는 했다. 그 보드라운 살결을 내 손 끝으로 느껴볼 수 있었으면. 그 목소리를 내 귀로 들을 수 있었으면. 하지만 벽은 굳건했다. 벽을 부수려 할 때 마다 그녀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말렸다. 그녀에게 닿으려는 몇 번의 시도가 좌절되고, 그 때마다 나는 기나긴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처녀가 된 소녀는 이제 또 한번의 변화를 겪으려 하고 있었다. 팽팽히 당겨졌던 피부의 힘이 서서히 풀어져가는게 보였다. 그녀는 괴로워했다. 더이상 아름답지 않아. 그녀는 울부짖었다. 이대로라면 분명히 나는 추하게 변해버릴 거야. 더이상 머리카락에 윤기가 돌지 않아. 입술도 붉지 않아. 그렇게 된다면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겠지. 나를 버릴테지. 그녀는 울부짖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여전히 아름다워. 그리고 언제까지나 아름다울 거야. 그녀가 내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정말? 내가 여전히 아름다워? 여전히 나를 사랑해? 내게 거짓을 말하려 들지 마. 나는 너야. 사랑해. 나는 그녀 외에는 다른 무엇도 생각할 수 없었다. 사랑해.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나는 널 사랑해. 그녀는 여태껏 내가 보아왔던 그 어떤 모습들보다 아름답게 웃었다. 매끄럽게 휘어진 입술은 천천히 나를 불렀다. 이리와. 이쪽으로 와. 우리가 하나가 될 시간이야. 기다려왔잖아. 네가 태어났던 순간부터, 내가 태어났던 순간부터.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그 순간부터. 그녀가 나를 부른다. 올 수 있다고 손짓한다. 벽 따위는 부숴버리고 나에게 오라며 끊임없이 손짓했다. 나는 벽을 손으로 내리쳤다. 그녀의 모습이 일그러진다. 안돼, 안돼. 내 머리를 들이받았다. 그녀의 모습이 산산히 부서졌다. 그녀가 피를 흘린다. 안돼, 그럴 순 없어. 나는 쉴 새 없이 벽을 내리쳤다. 내 손에서, 얼굴에서, 눈에서, 피가 흐른다. 피가 흐른다. 피를 흘린다. 부서졌다, 벽이. 나는 산산조각이 난 그녀를 만났다. 그래도 그녀는 아름다웠다. 산산히 흩어진 조각 뿐이라고 해도 그녀는 여전히 빛나며 여전히 아름다웠다. 나는 조각난 그녀를 삼켰다. 한 조각, 한 조각. 마지막 부스러기까지 삼켰다. 마침내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 사이코 같음의 정점~. 081028.
15층, 층간 높이를 3m로 잡는다면 지상 45m. 아마 실제로는 그것보다 조금 더 될거다. 지표면 위의 수평 50m는 그리 긴 거리가 아니지만 수직 50m는 끔찍하게 높은 수치였다. 떨어진다면 분명 그걸로 끝이겠지. 내 방에서 45m 허공으로 통하는 유일한 출구, 나는 그 사각의 유리문이 두렵다. 우습지. 한없이 바깥을 원하고 원하면서도 나는 저 유리창이 두렵다. 연다면 떨어져버릴까봐. 무엇이?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바깥 공기와 바람이 좋았다. 그래서, 가끔씩 엄마나 다른 사람이 창문을 열어두면 다시 닫아줄 때 까지 그대로 몇일이고 내버려뒀다. 나는 이렇게 수동적인 인간이다. 닫힌 유리 너머로 바깥을 내려다보는 것도 꽤 괜찮았다. 밤이면 건물과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반짝반짝 빛나서, 예뻤다. 나가고 싶어. 하지만 그 불빛들은 가까이에서 본다면 하나도 예쁘지 않겠지. 그래서 나는 또 외출을 단념한다. 나는 이렇게, 의지랄 것도 없는 나무늘보 같은 인간이었다. 무엇보다 비오는 날이 제일 좋았다. 창문을 때리는 빗방울을, 흘러내리는 물방울들을 유리창에 코를 박고 바라보는 게, 너무나도 좋았다. 빗방울이 유리를 때리며 나는 그 소리들도 좋았고 이따금씩 바람에 덜컹거리는 유리창도 그때만은 좋았다. 물론 언제나 엄마의 손에 잡혀 책상으로 되돌아가야 했었지만. 그러니까, 나는 닫힌 유리창이 두렵지는 않았다. 창가의 안락의자와 미니 콤포넌트가 있는 자리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였고, 불면의 밤이면 나는 그 의자 위에서 웅크린 채 잠들고는 했다. 하지만 그래도 열 수는 없다. 열린 창문으로 몸을 내밀고 밖을 내다보는 건 더더욱 할 수 없었다. 아니, 하지 않아아만 했다. 나의 충동, 태어나자마자 소멸을 향해 달려가는 숙명을 안고 태어난 유전자. 삶의 의지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그런 나는 인습에 묶이고 시선에 묶여서 충동을 억눌러야만 했다. 문을 열고 싶은 손을 내 스스로 거두었다. 내려다보고 싶은 몸을 다시 뒤로 뺐다. 저 허공과 나를 스스로 단절시켰다. 허나 이미 나는 그 허공을 날고 있는지도 몰랐다. 몸은 여기, 정신은 저기에. 나는 매번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애써 삶의 끈을 부여잡고 또 부여잡았다. 고통에 대한 두려움, 그건 유일한 내 생명줄이었다. 아픈건 싫어.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머리통이 박살나는, 온 몸의 뼈가 아스라지는 그 고통만은 절대로 겪고 싶지 않았다. 반대로 그것 외에는 날 붙잡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만약 내가 조금만 더 고통에 무감각한 인간이었다면 난 이미 저 허공으로 몸을 던졌겠지. 추락할 수 밖에 없겠지만 잠깐의 비행을 즐길 것이다. 귓가를 가르는 비명과도 같은 바람과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풍경. 아마 잠깐동안만은 나는 자유롭겠지. 갈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고통을 이겨낼 의지도, 스스로 몸을 던질 의지도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빼앗긴 자유가 나를 저 출구로 떠밀지 않았다면 나는 비정상적인 비상구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다. 방문은 언제나 닫혀 있었으니까. 대신 나는 점점 안으로 웅크러들어 소멸했겠지. 그것 뿐이다. 결국 나의 선택지는 자멸, 혹은 파괴되는 것. 이유? 그런 건 없었다. 그저 애초에 나는 삶에 애착같은 건 없었다. 남겨질 사람들의 고통 같은 건, 이미 내가 없어진 후의 이야기이니 상관 없었다. 세계는 그저 각질 조금이 떨어져나갔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는다. 죽을 이유도 없지만 살 이유도 없었다. 그것 뿐이었다. 미래를 바라고 사는 것도 아니었고 원하는 것도 없었고 욕심따위도 없었다. 좋아하는 것도 없고 싫어하는 것도 없다. 감정 자체가 소비였고 사치였다. 아니, 모든게 단지 주입되고 교육된 습관일 뿐이었다. 내 의지가 뭐가 있지? 이게 좋고 이게 나쁜거라고 교육받았을 뿐이었다. 만들어진 생. 적어도 끝은 내 손으로 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만들어진 인생에도 권리는 있다. 그리하여 나는 창문을 열었다. 활짝. 항상 굳게 닫았던 방충망도 열어제꼈다. 음악을 시끄럽게 틀었다. 열린 창문으로 온 동네에 퍼진다. 억지로 잠든 도시는 깨어난다. 굳게 닫힌 방문을 시끄럽게 두드리는 누군가가 있었다. 열어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창틀에 걸터앉아 발을 흔들었다. 내 등 뒤는 45m의 허공. 나는 잠이 좀 자고 싶었을 뿐이었다. 나는 허공에 드러누웠다. 바람이 시원했다. 깨어난 도시에서 나는 혼자 잠들었다. ------------------------------------------------------------ 081109
차가운 밤바람이 귓가에 감겼다 날아갔다. 스테인리스 창틀에 닿은 얼굴이 시원했다. 창 밖으로 내밀어 걸친 손에는 흰 담배가 걸려있고. 검은 하늘로 연기를 다시 토해냈다. 아, 시원해. 습기라고는 없는, 차고 건조한 공기에 피부가 쩍쩍 갈라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뭐, 괜찮았다. 분명 내일이면 또 윗집에서 담배 연기 올라온다고 난리에 난리를 치겠지만 나는 이 짧은 끽연 시간이 좋았다. 이놈의 도시는 어두워질 도시는 어두워질 생각을 않는다. 말이지, 이게 한 한시 정도 넘으면 불이 삭 다 꺼져야 내다보는 재미도 있고 그런건데, 여전히 사람들이 종종거리며 돌아다니는 1시 반의 밤거리는 영 재미가 없었다. 자동차도 여전히 바빴다. 한 세시는 되어야 잠잠해지지. 도시는. 가로등 아래서 진하게 키스를 하는 연인들도 있었고, 술 취해 비틀거리다 한바탕 토악질을 하고 가는 취객도 있었다. 뭐, 말하자면 이건 내 일종의 취미생활이었다. 퇴근해서 씻고, 담배에 맥주캔 하나 들고 창가로 가 앉는 것. 쓰잘데기 없는 뉴스를 보고 앉아있는 것 보다는 이게 훨씬 재미있었다. 그렇게 높은 곳도 아니라서 주위만 조용하다면 말소리도 가끔씩 들렸고. 저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기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까? 길거리를 배경으로 한 옴니버스극을 보는 기분이었다. 제목은 길거리 인생사, 쯤 되려나. 그렇게 바깥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 귀에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있던 나는 소리의 근원을 찾아 창 밖으로 몸을 쭉 내밀고 여기저기 둘러봤다. 저 먼 길거리부터 앞 현관. 소리는 조금 으슥한 뒷골목의 가로등 아래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머리채를 휘어잡힌 여자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빛을 받아서 이따금씩 번뜩번뜩 빛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칼날이었다. 땅그랑. 빈 맥주캔이 쓰러져 요란하게 굴렀다. 지나가는 사람은 드물었다지만, 주변에는 높고 낮은 건물 투성이였다. 사람도 분명히 많았다. 나는 비명 소리에 창문이 열리고 불이 켜지는 집을 몇 군데나 보았다. 누군가는 나처럼 몸을 빼고 밖을 둘러보다가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그 사람과 나와 둘다 그 여자를 보았다. 그 여자는 애타게 소리를 질렀다. 옷이 찢기고 벗겨지면서 마구 소리를 질렀다. 그건 분명 나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귀를 때렸을 것이었다. 비명은 끊겼다. 하지만 가로등 아래의 기괴하게 얽힌 두 다리 만큼은 선명했다. 아, 나는 숨을 죽였다. 번득이는 칼날이 빛을 반사해 내 눈이 부셨다. 그럴 리가 없었다. 이내 그 빛은 여자의 몸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다시 나왔다가, 다시 사라졌다. 그 여자는 그 때마다 꿈틀거렸다. 둔탁한 비명소리가, 목 안에서 끓는 피 가래의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나는 살해 현장을 목격한 것이었다. 목격한 것은 나 혼자만이 아녔다. 그 곳에는 수많은 목격자들이 존재했다. 내 옆에는 전화기가 존재했다. 나는 어디던 신고할 수 있엇다. 누구던 부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여자가 그렇게 토막이 나고 몇 덩이의 고깃덩이로 화하는 장면을 하나하나 다 지켜보면서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수많은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공범이었다. 공범이었다. 그 남자는 칼을 내던지고 자리를 떴다. 마치 영화가 끝나면 막이 내려가듯, 커텐은 다시 내려지고 밝혀졌던 불들은 다시 꺼졌다. 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 처럼 다시 잠들 것이다. 내가 저기에 서 있지 않았어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잠에 들고 사랑하는 사람을 끌어안은 채 깊게 잠을 잘 것이다. 그리곤 내일 일어나서 어떻게 저런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냐면서 목소리를 높이겠지.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담배를 맥주캔 안으로 구겨넣고 넘어진 캔들을 집어들었다. 저 여자의 일은 딱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서 뭐. 그건 그저 창 밖의 인생들일 뿐이었다. 길거리 인생사. 집 안의 나와는 별개의 일이었다. 살 수도 있었겟지. 하지만 아닐 수도 있었던 거였다. 내가 살릴 수도 있었겠지만 내가 살릴 수 없었을 지도 모르는 삶이다. 살인 방조. 글쎄. 나는 그저 길거리를 내다보았을 뿐이다. 공범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었다. 다만 그 뿐이었다. 여자는 죽었고, 집 안의 사람들은 잠든다. 내일을 산다. 아마 언젠가는 그 안의 사람들이 길거리의 그 여자가 되겠지만. 그래서 밤인 것이다. 밤의 길거리인 것이다. 내일도 저 자리에선 살인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 누가 죽었는지도 모르고 열렬히 키스하는 연인들이 있을 수도 있다. 누군가가 술에 취해 잠들 수도 있다. 그런 것이다. 나는, 다만 볼 뿐이다. 그럴 뿐인 것이다. -------------------------- 081116
K씨는 화랑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가 그림을 사는 것은 되팔기 위해서도 있엇지만, 어느 정도는 그가 소장하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그래서 전 세계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그림을 모으고는 했다. K씨의 화랑에는 유명 화가의 그림보다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화가, 혹은 누가 그렸는지조차도 알 수 없는 그림들이 즐비했다. 화랑에 찾아오는 대부분의 '사모님' 들은 좋은 그림보다는 유명 화가의 비싼 그림들로 자신의 재력과 안목을 자랑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K씨는 번번히 퇴짜를 맞고는 했다. 그 나름의 미술관을 가지고 있던 K씨는 시대에 뒤쳐진 사람이라는 평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K씨의 화랑에 우연히 들리게 된 것은 몇번의 쓰라린 좌절을 겪은 그가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하지만 유명 작가의 그림이 아닌 걸작을 찾겠다고 나서려 한다는 소문이 돌 무렵이었다. 특이하고 재미있는 그림이 많다면서 시간이 나면 한번 찾아가나 봐 달라는 그의 지인의 부탁을 -물론 그는 내 지인이기도 했다- 받은 나는 그 당시에는 그림을 살 생각이라고는 요만큼도 없었다. 부담할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예술에 조예가 깊은것도,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림을 사봤자 창고에 처박아두고 말 거라는 판단 하에서였다. 그러나 나는 소위 한량이었고, 시간은 남아돌았다. 그게 비싼 그림이던 아니던 사는게 아니고 가서 잠깐 봐 주는 정도라면, 뭐 손해 보는 장사는 아녔다. 할머니가 억지로 주선한 맞선자리에서 도망쳐 나온 나는 기분이 꿀꿀해져 길거리를 쏘다니다 전에 얼핏 주워들은 적 있던 K씨의 화랑에 들어섰다. 그야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그를 조금 알고 있었다. 나는 그를 경멸하고 있었다. 그는 실패자였다. 잘 사는 것도 아니면서 적당히 세상과 타협할 줄 모르고 시대에 편승할 줄 모르는, 그런 낙오자. 이미 악명이 높은 그의 화랑에는 손님의 발길이 끊긴지 오래였다. 다 낡아서 삭아버린 소파에 파묻혀있던 그는 갑작스런 방문에 호들갑스레 일어나 날 반겼다. 무슨 그림을 보러 오셨습니까, 어떤 그림이 마음에 드십니까? 종이컵에 싸구려 인스턴트 커피를 담아 내놓으며 그는 분주히 화랑 안을 들아다녔다. 나는 그에게 볼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를 무시하고, 벽과 바닥을 어지럽게 뒤덮은 그림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뭐, 그림이라면 괜찮았다. 그림의 가격만 따지는 사람이 아니라면 '느낌'이 좋다고 판단할 법한 수작들은 많았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아무렇게나 휘갈긴 듯한 그림, 환희에 가득 차 춤을 추는 붓자국. 격렬한 감정의 색채를 지닌 그림들이 중구난방으로 배치되어 있어 그림에서 그림으로 시선을 옮길 적 마다 나는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기분에 시달려야 했다. 솟구치고, 추락하고. 어느새 깊이 몰입해버린 나는 뚫어져라 그림 하나하나를 뜯어보았다. 확실히 '괜찮았다'. 아니, 훌륭했다. 그렇게 쿵쿵 뛰는 가슴으로 마치 숨겨진 듯 구석에 걸려있는 그림을 바라보았을 때. 비명이라도 지를 뻔 했다. 그림으로, 내가 빨려들어간다. 그가 부르는 소리에 나는 겨우 제정신을 차렸다. 나의 정신은 온전치 않은 상태였다. 나는 내가 무슨 단어의 나열을 내뱉을 지 알고 있었다. 나는 그 그림을 가리키며 K씨에게 다급히 외쳤다. 이 그림은 나의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 만들어진 그림이었다. 그러기 위해 그려졌다. 다른 누군가의 손을 타게 할 수는 없었다. "저 그림, 제게 파시죠. 돈이라면 얼마든지 지불하겠습니다." 나는 지감을 꺼내들었다. 얼마를 달라 하던 내겐 구입할 용의가 있었다. 이 그림을 놓치면 안된다. 등골이 오싹했다. 무저갱의 저 밑바닥에서부터 불어오는 시꺼멓고 스산한 바람이었다. 그림이 내게 속삭였다. 나를 가져가, 나를 너의 집에 걸어둬. 네 곁에 둬. 나를 자랑해. 그림이 내게 속삭였다. "죄송하지만, 이건 안됩니다." K씨가 그렇게 말을 하자마자 내 속에선 무언가가 확 끓어올랐다. 전신을 흐르는 피가 거꾸로 도는 기분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건 내 그림인데, 다른 이의 손에 있게 할 수는 없는데. 왜 안된다는 거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뒤에선 그림이 내게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었다. 가져가. 난 네거야. 날 강탈해가. 넌 할 수 있어. 봐, 너는 내가 좋잖아? 날 가져가고 싶지?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주변 바닥에 놓여있는 액자를 집어들고 그의 머리를 망설임없이 후려쳤다. 조금의 주저함도 없는 깔끔한 스윙. 차가운 바닥에 널부러진 그의 머리 주변에 붉게 피가 번졌다. 지독히 붉었다. 아니, 지독하게 검었다. 그의 피는 검은색이었다. 죽었을까? 알 수 없었다. 죽지 않았다고 했어도 그는 내 신상명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상관이 없는 자였다. 나는 그의 혈흔이 묻은 액자를 천천히 닦아내고 내 지문이 묻었을 종이컵을 구겨 주머니에 넣었다. 문고리까지 깨끗하게 닦았다. 나는 "나의 그림" 을 집어들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이것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 오직 나의 것. 나는 그림을 내 집 아주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었다. 그림을 바라볼 때 마다 마치 정신이 그림으로 옮겨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지독한 쾌감이었다. 하루종일 그림만 쳐다보고 있어도 좋았다. 언젠가 한 두번 손을 대었었던 마약보다 이것은 훨씬 매혹적이고 중독성이 있었다. 나는 점차로 밖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수일을 보냈다. 그러다 나는 문득 문을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문을 두드리는 그 자는 뭐라고 크게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문을 열려 몸을 움직였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겨우 움직였지만 뒤로 넘어졌을 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겨우 돌려 거울을 바라봤다. 그리고 내가 거울을 통해 본 것은 또 하나의 그림이었다. ----------------------------- 07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