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기에 있어. 아아, 너와 나를 갈라놓는 이 차가운 벽을 산산히 조각내고 싶어. 너를 만지고 싶어. 너에게 닿고 싶어. 그녀는 거의 항상 무표정했다. 이따금 고뇌에 찬 듯 미간을 찌푸릴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 둥근 눈썹과 이마, 아무것도 담지 않은 듯, 또 모든 것을 담을 듯한 눈. 매끄러운 콧잔등. 붉고 도톰한 입술. 사랑스럽고, 사랑스럽다. 나의 여인.
그녀를 향한 나의 사랑은 언제나 지고지순했다. 그 고귀한 얼굴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나는 그녀를 동경했다. 그녀가 무엇인지는 내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따금씩 지어주는 그 희미한 미소에 나는 위안을 찾았다. 갸름한 눈이 반달같이 휘어지고 붉은 입술 새로 흰 의가 드러나 빛나는 그 찰나의 순간에서.
나는 그녀가 자라는 것을 주욱 지켜봐왔었다. 얼마 전까지 그녀는 막 솟아오른 가슴이 봉긋한 소녀였다. 소녀가 처녀가 되어가는 그 모습은 얼마나 신비로운지. 통통했던 볼이 갸름해지고 팔다리는 길고 날씬해졌으며 허리는 유려한 곡선을 그렸다. 그녀의 몸은 점점 어머니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풋사과는 빨갛게 익어 달큰한 향내를 풍겼다. 그녀 역시도 달콤했다. 나는 항상 침을 삼켜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는 닿을 수 없었다. 나 같은 것이 닿는다면 그녀는 더러워지고 말아. 나는 그녀의 처녀를 지켜야만 했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탐낼 수많은 정욕들로부터 그녀의 싱그러움을 지켜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침울했다. 나는 그녀의 미소 한 번을 보기 위해 기나긴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었다. 손을 뻗어봤자 닿은 건 차갑디 차가운 유리벽이었지만 나는 항상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었다. 그렇게 한다면 그녀가 봄눈 녹듯이 내게 웃어줄 것만 같았기 때문에. 하지만 그 내 작은 시도가 좌절될 때 마다 그녀는 수심에 가득찬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체념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조차 이곳에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 모양만으로도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안녕, 사랑해, 안돼. 내가 하고 있는 말은 그녀에게 전해지고 있는 걸까? 알 수 없었다. 다만 가 닿기를 바랄 뿐이었다. 내가 여기에 있어. 나는 너를 사랑해. 너는 아름다워.
내가 말을 걸 때마다 그녀는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다. 가끔은 웃어주기도 했고, 가끔은 화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매번 무표정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나에게 반응을 보여주었던 그 날을 나는 잊지 못할 것이다. 기뻐하는 나를 보며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그런 웃음을 자주 지어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가 웃어주는 건 나밖에 없었다. 다른 누구도 그녀의 그런 아름다움을 알지 못했다.
이미 그녀는 나 자신이었다.
그녀의 희노애락, 모두 나의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육체 외의 모든 것을 온전히 소유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자명한 사실이었고, 또 언제까지나 그래야만 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도 그렇기를, 그렇게 되기를 원하고 있다는 걸. 언젠가 이 벽이 무너지고 진정으로 우리가 하나가 되는 날을. 정신과 정신, 그리고 육체와 육체의 결합. 그건 저 추잡한 짐승들의 성교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숭고한 행위였다. 우리의 결합.
그녀는 나를 온전히 흡수할 것이다. 그 절대적인 아름다움은 내 저속함을 충분히 정화시키고도 남을 것이리라. 나의 고뇌를 잠재우고 내게 위안이 되어줄 그녀. 내가 살아온 시간은 언젠가 찾아올 그 결합의 날을 위한 것들이었다. 내 인생은 그 순간을 위해 예정되어있던 것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그녀를 지키고, 또 지키면 되었다. 더러운 세상으로부터.
하지만 나는, 가끔 그녀를 내 오감으로 직접 느끼고 싶다는 욕구에 휩싸이고는 했다. 그 보드라운 살결을 내 손 끝으로 느껴볼 수 있었으면. 그 목소리를 내 귀로 들을 수 있었으면. 하지만 벽은 굳건했다. 벽을 부수려 할 때 마다 그녀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말렸다.
그녀에게 닿으려는 몇 번의 시도가 좌절되고, 그 때마다 나는 기나긴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처녀가 된 소녀는 이제 또 한번의 변화를 겪으려 하고 있었다. 팽팽히 당겨졌던 피부의 힘이 서서히 풀어져가는게 보였다. 그녀는 괴로워했다. 더이상 아름답지 않아. 그녀는 울부짖었다. 이대로라면 분명히 나는 추하게 변해버릴 거야. 더이상 머리카락에 윤기가 돌지 않아. 입술도 붉지 않아. 그렇게 된다면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겠지. 나를 버릴테지. 그녀는 울부짖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여전히 아름다워. 그리고 언제까지나 아름다울 거야. 그녀가 내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정말? 내가 여전히 아름다워? 여전히 나를 사랑해? 내게 거짓을 말하려 들지 마. 나는 너야.
사랑해. 나는 그녀 외에는 다른 무엇도 생각할 수 없었다. 사랑해.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나는 널 사랑해. 그녀는 여태껏 내가 보아왔던 그 어떤 모습들보다 아름답게 웃었다. 매끄럽게 휘어진 입술은 천천히 나를 불렀다. 이리와. 이쪽으로 와. 우리가 하나가 될 시간이야. 기다려왔잖아. 네가 태어났던 순간부터, 내가 태어났던 순간부터.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그 순간부터.
그녀가 나를 부른다. 올 수 있다고 손짓한다. 벽 따위는 부숴버리고 나에게 오라며 끊임없이 손짓했다. 나는 벽을 손으로 내리쳤다. 그녀의 모습이 일그러진다. 안돼, 안돼. 내 머리를 들이받았다. 그녀의 모습이 산산히 부서졌다. 그녀가 피를 흘린다. 안돼, 그럴 순 없어. 나는 쉴 새 없이 벽을 내리쳤다. 내 손에서, 얼굴에서, 눈에서, 피가 흐른다. 피가 흐른다. 피를 흘린다.
부서졌다, 벽이. 나는 산산조각이 난 그녀를 만났다. 그래도 그녀는 아름다웠다. 산산히 흩어진 조각 뿐이라고 해도 그녀는 여전히 빛나며 여전히 아름다웠다. 나는 조각난 그녀를 삼켰다. 한 조각, 한 조각. 마지막 부스러기까지 삼켰다.
마침내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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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코 같음의 정점~. 081028.
개인적으로 써놓고서도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 미묘했던 글.흔히 있는 호러물 st이긴 한데 주제가 '거울' 이었어서 나르시즘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었다.
15층, 층간 높이를 3m로 잡는다면 지상 45m. 아마 실제로는 그것보다 조금 더 될거다. 지표면 위의 수평 50m는 그리 긴 거리가 아니지만 수직 50m는 끔찍하게 높은 수치였다. 떨어진다면 분명 그걸로 끝이겠지. 내 방에서 45m 허공으로 통하는 유일한 출구, 나는 그 사각의 유리문이 두렵다. 우습지. 한없이 바깥을 원하고 원하면서도 나는 저 유리창이 두렵다.
연다면 떨어져버릴까봐. 무엇이?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바깥 공기와 바람이 좋았다. 그래서, 가끔씩 엄마나 다른 사람이 창문을 열어두면 다시 닫아줄 때 까지 그대로 몇일이고 내버려뒀다. 나는 이렇게 수동적인 인간이다.
닫힌 유리 너머로 바깥을 내려다보는 것도 꽤 괜찮았다. 밤이면 건물과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반짝반짝 빛나서, 예뻤다. 나가고 싶어. 하지만 그 불빛들은 가까이에서 본다면 하나도 예쁘지 않겠지. 그래서 나는 또 외출을 단념한다. 나는 이렇게, 의지랄 것도 없는 나무늘보 같은 인간이었다.
무엇보다 비오는 날이 제일 좋았다. 창문을 때리는 빗방울을, 흘러내리는 물방울들을 유리창에 코를 박고 바라보는 게, 너무나도 좋았다. 빗방울이 유리를 때리며 나는 그 소리들도 좋았고 이따금씩 바람에 덜컹거리는 유리창도 그때만은 좋았다. 물론 언제나 엄마의 손에 잡혀 책상으로 되돌아가야 했었지만.
그러니까, 나는 닫힌 유리창이 두렵지는 않았다. 창가의 안락의자와 미니 콤포넌트가 있는 자리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였고, 불면의 밤이면 나는 그 의자 위에서 웅크린 채 잠들고는 했다. 하지만 그래도 열 수는 없다. 열린 창문으로 몸을 내밀고 밖을 내다보는 건 더더욱 할 수 없었다.
아니, 하지 않아아만 했다. 나의 충동, 태어나자마자 소멸을 향해 달려가는 숙명을 안고 태어난 유전자. 삶의 의지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그런 나는 인습에 묶이고 시선에 묶여서 충동을 억눌러야만 했다. 문을 열고 싶은 손을 내 스스로 거두었다. 내려다보고 싶은 몸을 다시 뒤로 뺐다. 저 허공과 나를 스스로 단절시켰다.
허나 이미 나는 그 허공을 날고 있는지도 몰랐다. 몸은 여기, 정신은 저기에. 나는 매번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애써 삶의 끈을 부여잡고 또 부여잡았다. 고통에 대한 두려움, 그건 유일한 내 생명줄이었다. 아픈건 싫어.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머리통이 박살나는, 온 몸의 뼈가 아스라지는 그 고통만은 절대로 겪고 싶지 않았다.
반대로 그것 외에는 날 붙잡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만약 내가 조금만 더 고통에 무감각한 인간이었다면 난 이미 저 허공으로 몸을 던졌겠지. 추락할 수 밖에 없겠지만 잠깐의 비행을 즐길 것이다. 귓가를 가르는 비명과도 같은 바람과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풍경. 아마 잠깐동안만은 나는 자유롭겠지.
갈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고통을 이겨낼 의지도, 스스로 몸을 던질 의지도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빼앗긴 자유가 나를 저 출구로 떠밀지 않았다면 나는 비정상적인 비상구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다. 방문은 언제나 닫혀 있었으니까. 대신 나는 점점 안으로 웅크러들어 소멸했겠지. 그것 뿐이다. 결국 나의 선택지는 자멸, 혹은 파괴되는 것.
이유? 그런 건 없었다. 그저 애초에 나는 삶에 애착같은 건 없었다. 남겨질 사람들의 고통 같은 건, 이미 내가 없어진 후의 이야기이니 상관 없었다. 세계는 그저 각질 조금이 떨어져나갔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는다. 죽을 이유도 없지만 살 이유도 없었다. 그것 뿐이었다. 미래를 바라고 사는 것도 아니었고 원하는 것도 없었고 욕심따위도 없었다. 좋아하는 것도 없고 싫어하는 것도 없다. 감정 자체가 소비였고 사치였다. 아니, 모든게 단지 주입되고 교육된 습관일 뿐이었다. 내 의지가 뭐가 있지? 이게 좋고 이게 나쁜거라고 교육받았을 뿐이었다. 만들어진 생.
적어도 끝은 내 손으로 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만들어진 인생에도 권리는 있다.
그리하여 나는 창문을 열었다. 활짝. 항상 굳게 닫았던 방충망도 열어제꼈다. 음악을 시끄럽게 틀었다. 열린 창문으로 온 동네에 퍼진다. 억지로 잠든 도시는 깨어난다. 굳게 닫힌 방문을 시끄럽게 두드리는 누군가가 있었다. 열어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창틀에 걸터앉아 발을 흔들었다. 내 등 뒤는 45m의 허공. 나는 잠이 좀 자고 싶었을 뿐이었다.
나는 허공에 드러누웠다. 바람이 시원했다. 깨어난 도시에서 나는 혼자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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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109
그러니까, 나는 이런 스타일의 글이 가장 쓰기 쉽고- 쓰고 나면 마음에 들 확률이 제일 높다. 왜냐면 반쯤은 내 이야기거든(...)
차가운 밤바람이 귓가에 감겼다 날아갔다. 스테인리스 창틀에 닿은 얼굴이 시원했다. 창 밖으로 내밀어 걸친 손에는 흰 담배가 걸려있고. 검은 하늘로 연기를 다시 토해냈다. 아, 시원해. 습기라고는 없는, 차고 건조한 공기에 피부가 쩍쩍 갈라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뭐, 괜찮았다. 분명 내일이면 또 윗집에서 담배 연기 올라온다고 난리에 난리를 치겠지만 나는 이 짧은 끽연 시간이 좋았다.
이놈의 도시는 어두워질 도시는 어두워질 생각을 않는다. 말이지, 이게 한 한시 정도 넘으면 불이 삭 다 꺼져야 내다보는 재미도 있고 그런건데, 여전히 사람들이 종종거리며 돌아다니는 1시 반의 밤거리는 영 재미가 없었다. 자동차도 여전히 바빴다. 한 세시는 되어야 잠잠해지지. 도시는.
가로등 아래서 진하게 키스를 하는 연인들도 있었고, 술 취해 비틀거리다 한바탕 토악질을 하고 가는 취객도 있었다. 뭐, 말하자면 이건 내 일종의 취미생활이었다. 퇴근해서 씻고, 담배에 맥주캔 하나 들고 창가로 가 앉는 것. 쓰잘데기 없는 뉴스를 보고 앉아있는 것 보다는 이게 훨씬 재미있었다. 그렇게 높은 곳도 아니라서 주위만 조용하다면 말소리도 가끔씩 들렸고. 저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기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까? 길거리를 배경으로 한 옴니버스극을 보는 기분이었다. 제목은 길거리 인생사, 쯤 되려나.
그렇게 바깥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 귀에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있던 나는 소리의 근원을 찾아 창 밖으로 몸을 쭉 내밀고 여기저기 둘러봤다. 저 먼 길거리부터 앞 현관. 소리는 조금 으슥한 뒷골목의 가로등 아래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머리채를 휘어잡힌 여자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빛을 받아서 이따금씩 번뜩번뜩 빛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칼날이었다. 땅그랑. 빈 맥주캔이 쓰러져 요란하게 굴렀다. 지나가는 사람은 드물었다지만, 주변에는 높고 낮은 건물 투성이였다. 사람도 분명히 많았다. 나는 비명 소리에 창문이 열리고 불이 켜지는 집을 몇 군데나 보았다. 누군가는 나처럼 몸을 빼고 밖을 둘러보다가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그 사람과 나와 둘다 그 여자를 보았다.
그 여자는 애타게 소리를 질렀다. 옷이 찢기고 벗겨지면서 마구 소리를 질렀다. 그건 분명 나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귀를 때렸을 것이었다. 비명은 끊겼다. 하지만 가로등 아래의 기괴하게 얽힌 두 다리 만큼은 선명했다. 아, 나는 숨을 죽였다. 번득이는 칼날이 빛을 반사해 내 눈이 부셨다. 그럴 리가 없었다. 이내 그 빛은 여자의 몸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다시 나왔다가, 다시 사라졌다. 그 여자는 그 때마다 꿈틀거렸다. 둔탁한 비명소리가, 목 안에서 끓는 피 가래의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나는 살해 현장을 목격한 것이었다. 목격한 것은 나 혼자만이 아녔다. 그 곳에는 수많은 목격자들이 존재했다. 내 옆에는 전화기가 존재했다. 나는 어디던 신고할 수 있엇다. 누구던 부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여자가 그렇게 토막이 나고 몇 덩이의 고깃덩이로 화하는 장면을 하나하나 다 지켜보면서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수많은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공범이었다. 공범이었다.
그 남자는 칼을 내던지고 자리를 떴다. 마치 영화가 끝나면 막이 내려가듯, 커텐은 다시 내려지고 밝혀졌던 불들은 다시 꺼졌다. 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 처럼 다시 잠들 것이다. 내가 저기에 서 있지 않았어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잠에 들고 사랑하는 사람을 끌어안은 채 깊게 잠을 잘 것이다. 그리곤 내일 일어나서 어떻게 저런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냐면서 목소리를 높이겠지.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담배를 맥주캔 안으로 구겨넣고 넘어진 캔들을 집어들었다. 저 여자의 일은 딱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서 뭐. 그건 그저 창 밖의 인생들일 뿐이었다. 길거리 인생사. 집 안의 나와는 별개의 일이었다. 살 수도 있었겟지. 하지만 아닐 수도 있었던 거였다. 내가 살릴 수도 있었겠지만 내가 살릴 수 없었을 지도 모르는 삶이다.
살인 방조. 글쎄. 나는 그저 길거리를 내다보았을 뿐이다. 공범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었다.
다만 그 뿐이었다. 여자는 죽었고, 집 안의 사람들은 잠든다. 내일을 산다. 아마 언젠가는 그 안의 사람들이 길거리의 그 여자가 되겠지만. 그래서 밤인 것이다. 밤의 길거리인 것이다. 내일도 저 자리에선 살인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 누가 죽었는지도 모르고 열렬히 키스하는 연인들이 있을 수도 있다. 누군가가 술에 취해 잠들 수도 있다. 그런 것이다. 나는, 다만 볼 뿐이다. 그럴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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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116
이건 실화를 기반으로 쓴 거였긴 했는데-.
어쩌다보니 좀..ㅋㅋ 그렇다. 이건 호와 오의 중간에 있는 글.
K씨는 화랑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가 그림을 사는 것은 되팔기 위해서도 있엇지만, 어느 정도는 그가 소장하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그래서 전 세계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그림을 모으고는 했다. K씨의 화랑에는 유명 화가의 그림보다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화가, 혹은 누가 그렸는지조차도 알 수 없는 그림들이 즐비했다. 화랑에 찾아오는 대부분의 '사모님' 들은 좋은 그림보다는 유명 화가의 비싼 그림들로 자신의 재력과 안목을 자랑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K씨는 번번히 퇴짜를 맞고는 했다. 그 나름의 미술관을 가지고 있던 K씨는 시대에 뒤쳐진 사람이라는 평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K씨의 화랑에 우연히 들리게 된 것은 몇번의 쓰라린 좌절을 겪은 그가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하지만 유명 작가의 그림이 아닌 걸작을 찾겠다고 나서려 한다는 소문이 돌 무렵이었다. 특이하고 재미있는 그림이 많다면서 시간이 나면 한번 찾아가나 봐 달라는 그의 지인의 부탁을 -물론 그는 내 지인이기도 했다- 받은 나는 그 당시에는 그림을 살 생각이라고는 요만큼도 없었다. 부담할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예술에 조예가 깊은것도,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림을 사봤자 창고에 처박아두고 말 거라는 판단 하에서였다. 그러나 나는 소위 한량이었고, 시간은 남아돌았다. 그게 비싼 그림이던 아니던 사는게 아니고 가서 잠깐 봐 주는 정도라면, 뭐 손해 보는 장사는 아녔다.
할머니가 억지로 주선한 맞선자리에서 도망쳐 나온 나는 기분이 꿀꿀해져 길거리를 쏘다니다 전에 얼핏 주워들은 적 있던 K씨의 화랑에 들어섰다. 그야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그를 조금 알고 있었다. 나는 그를 경멸하고 있었다. 그는 실패자였다. 잘 사는 것도 아니면서 적당히 세상과 타협할 줄 모르고 시대에 편승할 줄 모르는, 그런 낙오자.
이미 악명이 높은 그의 화랑에는 손님의 발길이 끊긴지 오래였다. 다 낡아서 삭아버린 소파에 파묻혀있던 그는 갑작스런 방문에 호들갑스레 일어나 날 반겼다. 무슨 그림을 보러 오셨습니까, 어떤 그림이 마음에 드십니까? 종이컵에 싸구려 인스턴트 커피를 담아 내놓으며 그는 분주히 화랑 안을 들아다녔다. 나는 그에게 볼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를 무시하고, 벽과 바닥을 어지럽게 뒤덮은 그림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뭐, 그림이라면 괜찮았다. 그림의 가격만 따지는 사람이 아니라면 '느낌'이 좋다고 판단할 법한 수작들은 많았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아무렇게나 휘갈긴 듯한 그림, 환희에 가득 차 춤을 추는 붓자국. 격렬한 감정의 색채를 지닌 그림들이 중구난방으로 배치되어 있어 그림에서 그림으로 시선을 옮길 적 마다 나는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기분에 시달려야 했다. 솟구치고, 추락하고. 어느새 깊이 몰입해버린 나는 뚫어져라 그림 하나하나를 뜯어보았다. 확실히 '괜찮았다'. 아니, 훌륭했다. 그렇게 쿵쿵 뛰는 가슴으로 마치 숨겨진 듯 구석에 걸려있는 그림을 바라보았을 때. 비명이라도 지를 뻔 했다.
그림으로, 내가 빨려들어간다.
그가 부르는 소리에 나는 겨우 제정신을 차렸다. 나의 정신은 온전치 않은 상태였다. 나는 내가 무슨 단어의 나열을 내뱉을 지 알고 있었다. 나는 그 그림을 가리키며 K씨에게 다급히 외쳤다. 이 그림은 나의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 만들어진 그림이었다. 그러기 위해 그려졌다. 다른 누군가의 손을 타게 할 수는 없었다.
"저 그림, 제게 파시죠. 돈이라면 얼마든지 지불하겠습니다."
나는 지감을 꺼내들었다. 얼마를 달라 하던 내겐 구입할 용의가 있었다. 이 그림을 놓치면 안된다. 등골이 오싹했다. 무저갱의 저 밑바닥에서부터 불어오는 시꺼멓고 스산한 바람이었다. 그림이 내게 속삭였다. 나를 가져가, 나를 너의 집에 걸어둬. 네 곁에 둬. 나를 자랑해. 그림이 내게 속삭였다.
"죄송하지만, 이건 안됩니다."
K씨가 그렇게 말을 하자마자 내 속에선 무언가가 확 끓어올랐다. 전신을 흐르는 피가 거꾸로 도는 기분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건 내 그림인데, 다른 이의 손에 있게 할 수는 없는데. 왜 안된다는 거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뒤에선 그림이 내게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었다. 가져가. 난 네거야. 날 강탈해가. 넌 할 수 있어. 봐, 너는 내가 좋잖아? 날 가져가고 싶지?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주변 바닥에 놓여있는 액자를 집어들고 그의 머리를 망설임없이 후려쳤다. 조금의 주저함도 없는 깔끔한 스윙. 차가운 바닥에 널부러진 그의 머리 주변에 붉게 피가 번졌다. 지독히 붉었다. 아니, 지독하게 검었다. 그의 피는 검은색이었다. 죽었을까? 알 수 없었다. 죽지 않았다고 했어도 그는 내 신상명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상관이 없는 자였다. 나는 그의 혈흔이 묻은 액자를 천천히 닦아내고 내 지문이 묻었을 종이컵을 구겨 주머니에 넣었다. 문고리까지 깨끗하게 닦았다. 나는 "나의 그림" 을 집어들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이것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 오직 나의 것.
나는 그림을 내 집 아주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었다. 그림을 바라볼 때 마다 마치 정신이 그림으로 옮겨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지독한 쾌감이었다. 하루종일 그림만 쳐다보고 있어도 좋았다. 언젠가 한 두번 손을 대었었던 마약보다 이것은 훨씬 매혹적이고 중독성이 있었다. 나는 점차로 밖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수일을 보냈다. 그러다 나는 문득 문을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문을 두드리는 그 자는 뭐라고 크게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문을 열려 몸을 움직였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겨우 움직였지만 뒤로 넘어졌을 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겨우 돌려 거울을 바라봤다.
그리고 내가 거울을 통해 본 것은
또 하나의 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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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914
사실 써내고서도 내가 어떻게 이런 글을 써냈지, 싶었던.
지금 다시 이런걸 써내라 그러면 아마 못 할거다. 헤르만 헤세의 환상동화집이 모티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