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가쁘다. 어지럽다. 몸 안을 날뛰는 열기에 정신마저 혼미해지는 그런 아련한 고통이었다. 승현에게 있어 권지용을 떠올린다는 것은 그런 일이었다. 상상만으로 몇 번이고 울리고, 끌어안고, 범하고, 범하고, 범하고. 온몸에 피어오른 열에 신음하며 우는 지용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치사량의 극독이었다. 눈에 어린 물기가 요사스러울 정도로 빛을 담고 반짝였다. 지용은 이미 승현에게 있어, 꿈 속의 마돈나였다.
얼마 전 까지만 하더라도, 승현에게 있어 지용은 단지 같은 반 녀석일 뿐이었다. 노는 패들도 완전히 달랐고 성적부터 품행까지 접점이라곤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용이 난데없이 승현의 꿈에 나타나기 전 까지는- 승현은 지용에게 별다른 관심은 없었다. 기묘한 꿈이었다. 어딘가 묘하게 틀어진 그 현실감. 마르고 새하얀 나신은 홀로 신음하고 있었다. 너무나 생생했다. 꿈에서 으레 느껴지는 미묘한 속도감이나 통제 불능의 자신은 그곳에 없었다. 얼마든지 뒤돌아서 다른 곳으로 나갈 수도 있었다. 그런 꿈이었다.
하지만 손을 대버렸다. 그리고 그에 화답해 지용의 몸도 활짝 열렸다. 땀에 젖은 살결이 달라붙는 그 느낌까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생생했다. 꿈에서 지용은 처녀처럼 아파했고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다가도 과감하게 다리를 벌리곤 매달려왔다. 정신없는 열락의 꿈. 깨어나고 나서 승현을 맞이한 것은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던 그 황량한 방이 아닌, 몇 번이고 본 천장과 잔뜩 젖어버린 속옷 뿐이었다.
"...미치겠다...."
바라본 시계는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일어나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하지만 승현은 자신이 곤란하지 않도록 일찍 깨워주는 이 꿈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벌써 몇번째일까, 이 꿈. 처음 한 번은 개꿈이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 다음번엔 내가 이 정도로 궁했던 건가 하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제는 세는 것 조차 포기했다. 그 사이에 꿈 속의 지용은 승현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이름을 불러오기 시작했다. 나누는 것은 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간간히,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것은 정사 도중이기도 했고, 한 번의 열락 뒤에 식힌 몸을 다시 달구는 과정에서이기도 했다. 정말 사소한 이야기들이었다. 이게 꿈이 맞을까? 아마도 꿈이겠지. 너도 꿈을 꾸고 있어? 어느 날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서 계속 이야기만 했던 날도 있었다.
이래서야, 정말- 권지용과 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제는 그게 꿈인지조차 의심되곤 했다. 기묘하지만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현실감이 이게 단순한 꿈은 아니란 걸 계속 승현에게 알려오고 있었으니까. 혹시 내게 몽유병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승현은, 정말 진심으로 고민했다.
하지만 이게 꿈이 아닐 리 없었다. 승현으로서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다리를 벌려오며 잠깐씩이지만 닳아빠진 창녀같은 모습을 내보이는 권지용과, 그저 활달하고 사교성 좋은 반장일 뿐인 녀석이 같은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맨 뒷자리에 늘어지듯 앉아 있던 승현은 고개를 돌려 교실 한편에서 왁자하게 떠들고 있는 무리 속의 권지용을 바라봤다. 하얀 와이셔츠가 잘 어울린다. 마냥, 어려 보인다. 왜 하필이면 권지용이었을까. 그런 모습으로 나오는 게 다른 누구도 아닌 권지용인 이유가 무엇일까.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래, 뭐라고 해야 할까- 승현은 적당한 말을 찾기 위해 잠깐 고민했다. 굳이 말하자면 꿈에서의 그는 붉은 느낌이었다. 붉고,붉어서 닿으면 손 끝마저 새빨갛게 젖어 버릴 것 같은 그런 느낌. 하지만 저기서 이를 활짝 드러내며 웃는 저 모습은 그저 하얗고, 하얗기만 했다. 흠 없고 구김 없는 그런 느낌. 저런 권지용이 그럴리가.
하지만 승현은 얼마 있지 않아 쉽게 단정내버린 자신을 비웃어야만 했다. 의자에 구부정하게 앉아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지용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승현은 그 고개가 천천히 돌아 자신을 바라보는 걸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웃음으로 가늘게 휘어져 있던 눈이 천천히 식어 푸르고 냉한 기운을 띄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심장이 내려앉는다. 승현과 눈이 마주치고서도 지용은 눈을 돌리지 않았다.
하얗다고? 저건 하얀 게 아니다. 승현은 자신의 부족한 어휘로는 '저것'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붉지 않았다. 하지만-
승현은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순간 차갑게 식었던 피가 이전보다 더 높은 온도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입안이 바짝 마른다. 그는 이제 고개를 돌려버려 이쪽을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푸르게 남은 잔상은 승현의 가슴을 쿡쿡 찔러댔다.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은 흥미와 관심, 그리고 욕구였다. 어째서인지 승현은 그게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기 시작했다.
뭐가 됐던, 그 꿈은 진짜다. 그러니까 그걸 끄집어 내고 싶었다. 새하얗고 어린 동물의 가죽을 뒤집어쓴 저 권지용에게서 그 모습을 억지로라도 끌어 낼 생각이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여전히 꿈 속의 풍경은 지독하게 황량했다. 침대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방.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밝혀진 조명과 어둠에 젖어 본래 색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벽과 천장. 매번 승현의 꿈은 그 방의 작은 문 앞에서 시작했다. 뒤로는 길고 긴 복도가 놓여 있었고, 그 복도를 따라서 문도 늘어서 있었다. 이 문만 있는 것이 아녔다. 다른 문으로도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승현은 결국 매번 이 곳을 선택했다. 창문 같은 건 없는데도 어디선가 스며드는 한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침대 위에, 권지용이 앉아 있었다.
"안녕."
"오늘은 평소보다 좀 늦었네."
"아아. 잠을 늦게 잤으니까."
눈을 휘며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낮의, 학교에서의 미소와는 근본부터가 달랐다. 가느름한 눈에는 항상 물기가 어린 듯 빛이 머물었다. 사람을 홀리는 얼굴이다. 뛰어나게 아름다운 얼굴은 아니었다. 그냥 단순히 '예쁜' 남자라면 승현의 주위에도 지겹게 많았다. 그것보다 하반신 욕구를 더 자극하는 여자들도 많았다.
그렇지만 왠지 구미가 당겼다. 처음부터 그랬다. 승현인 줄 모르고 그저 급하게 매달려왔던 그 때에도 단순한 흥미만은 아녔다.
"너 말야."
승현은 지용의 목을 한 손으로 살짝 쥐었다. 엄지손가락이 닿은 부분 아래에서 콩콩거리며 맥이 뛰는 게 느껴졌다.
"정말, 꿈이야? 아니면 내가 아는 그 권지용이야?"
"글쎄. 너는 뭐라고 생각하는데?"
"잘 모르겠지만- 여기서 네 목을 졸라 죽여버린다면 진짜 너도 죽는걸까."
승현을 올려다보는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작은 입술이 달싹였다. 알고 싶으면, 해봐. 하지만 승현은 그 말에 손에 힘을 빼버렸다.
"그랬다가 진짜 뒈지면 찜찜할테니까 싫어. 그러지 말고 네가 좀 얘기해보지 그래? 너는 뭔가 알고 있어? 진짜 너도 매일 밤 나를 만나고 있는 거야?"
"이건 네 꿈이야."
"그래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결국은 꿈이라는 거지."
영악하다. 이야기는 둘 다 알고 있는 사실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승현은 조금 작전을 바꿔 보기로 마음먹었다. 머리가 핑핑 도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뭔갈 위해 머리를 써본 적은 거의 없지만 나름대로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원하는 걸 얻어내는 방법 정도는 체득하고 있었다. 푹신한 침대 위로 올라타며 어깨를 밀어 뒤로 눕혔다. 그 눈은 오늘 학교에서와 같이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지만 담겨있는 것은 푸르고 냉한 것이 아닌 뜨겁고, 붉고, 진득한 것이었다. 턱을 붙들고 입을 맞췄다. 얽혀오는 혀가 너무나 익숙했다.
권지용의 몸은 항상 뜨거웠다. 그 안에 무슨 열기를 그렇게 가둬두고 있는 것인지.
"말해봐."
".....하아.뭘?"
"너에 대해서. 어차피 꿈일 테니까 내 맘대로 생각한 내용 아니겠어?"
몇 번이고 몸을 섞으며 알게 된 민감한 부분들을 자극하자 더운 숨이 흩어졌다. 하아, 하고 내뱉는 숨에는 명백한 웃음이 섞여들어 있었다. 그가 손을 뻗어 승현의 머리카락을 살짝 움켜쥐었다. 나는 말야, 작은 헐떡임이 섞여 있었지만 그는 입을 열어 이야기를 계속해나갔다. 승현은 혼잣말 같은 그 웅얼거림을 들으며 마르고 하얀 몸을 마음대로 열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승현의 손에 익숙해진 그 몸은 한 곳을 자극하면 이어질 자극에 먼저 기대하고 흥분해 있었다.
나는- 전부터.. 널 보고 있었어. 너는 제법 눈에 띄니까 말야. 생긴것도- 하는 짓도. 열기로 혼곤한 와중에도 그는 계속해서 말을 잇고 있었다. 그래서 멋대로 상상하고 있었어. 네가 꽤나 맘대로 놀고 있다는 건 웬만한 애들은 아니까. 남자라도 거절하지 않잖아- 너는. 그리고, 나는 남자를 좋아해. 섹시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안겨도 좋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는 하얗게 웃었다. 도저히 모를 놈이라고, 승현은 생각했다.
"내 꿈이라서, 내 맘대로 생각한 내용 치고는 너무 자세한 거 아냐?"
"그렇지만 내일 나는 이런 일 같은 거, 전혀 모르는 사람일 텐데 말야."
"확인해 보도록 할까."
"아니, 이건 꿈이야."
승현의 얼굴을 양 손으로 붙잡아 키스하며 지용은 다시 한번 더 속삭였다. 이건 꿈이야. 어느 쪽이 원해서 꾸는 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꿈이야. 꿈은 꿈으로 끝인거야.
꿈은 꿈으로 끝이라고? 승현은 잠에서 깨어나 알 수 없는 화에 시달려야만 했다. 평소였다면 어제 속에 들이부은 술 때문에 지금 시간에 깨어나지도 못했을 터였다. 학교를 나간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테고. 하지만 승현은 지금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느낌이던 뭐던, 학교에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얼굴을 보고, 시치미 떼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꿈은 꿈이라고? 이런 꿈은 듣도보도 못했다. 꿈일 리가 없었다. 나 혼자 착각하고 있는 거라고 꿈 속의 권지용은 계속 말해왔지만 나는 그걸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꿈이라고. 이런 게 꿈이라면 잠 따위 자고싶지 않았다.
속이 쓰려 당장에라도 위 속에 든 모든 것을 게워내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승현은 고집스레 학교로 향했다. 요즘들어 제 시간에 등교하는 승현을 보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내심 놀란 얼굴들이었지만 지금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당장에라도 멱살을 틀어쥐고 그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 집어 치우라고 하고 싶었다.
분명 속으로는 자신이 미쳐버린 게 아닐까, 하는 자각은 있었다. 이게 꿈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도 없었고 단순한 과대망상일 수도 있다는 것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건 그거대로 화가 나는 일이었고,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한다면 지금 끓어오르는 이 열을 주체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불공평해. 불공평하다, 이건. 욱하고 치밀어오르는 것을 꾹꾹 누르며 교실 문을 열어젖혔다. 생각보다 이른 시간이었어서, 교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문은 열려 있었다. 누군가 먼저 왔다는 소리다.
교실 안을 둘러보던 승현은 지용의 자리에서 가방을 발견했다. 그리고 뒤이어 닫혀있던 교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세수라도 한 건지 얼굴과 머리카락 끝이 젖은 채인 권지용이 문가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
"...이 시간에 오냐?"
"잠을 설치는 바람에. 그나저나.. 너도 이런 시간에 학교에 와?"
승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있는대로 말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자신에게 남아있는 한 조각의 이성이 그걸 끝까지 잡아 누르고 있었다. 자연히 이가 악물려졌다.
"........누구 덕분에, 나도 존나 뭣같은 꿈을 꿨거든?"
권지용의 입가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승현은 한 발짝 내딛었고, 그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승현이 다시 한 발 다가섰지만 그에게는 더이상 뒤로 물러날 공간이 없었다. 당장에라도 손을 뻗어 저 목을 틀어쥐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옷깃으로 가려진 곳 아래에 어제 자신이 남긴 자욱이 선명하게 남아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승현이었다.
"나 혼자 잠 설치는 건 너무 억울하잖아. 그런데 보니까 그건 아닌 것 같네."
"그-
지용은, 그 말에 뭐라고 대답하려 했지만 닫혀있던 문을 쾅 하고 열어젖힌 누군가에 의해 팽팽하던 긴장이 순식간에 허물어져 버렸다. 씨발. 승현은 낮게 욕을 내뱉고는 열린 문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그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고 있던 지용은 눈을 감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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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짧게 3편 연작으로 갈 겁니당. 담편은 지용이 시점 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