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는 연필을 들었다. 무언가를 쓰겠다고 정해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다. 실타래같이 엉킨 상념들을 풀어내기 전까지는 엉킨 그대로 존재할 것이었다. 나는. A는 두 글자를 적었다. 나는 너무도 힘겹다. 다시 적었다. 아니, 나는 힘든 것일까? 잘 모르겠다. 엉킨 실타래는 좀처럼 풀릴 기미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또 다시 한 문장을 끌어냈다. 내가 정말 힘들기 때문에 힘들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아니면 힘들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단지 그렇다고 적고 있을 뿐인 건가. 이번에는 한 문장을 더 써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화다운 화를 내 본 적이 언제의 일이던가. 조금 더 써 보기로 했다. 나는 무감각해졌다. 내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 내가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한다고 학습해왔기 때문에 이름 없는 기분에 억지로 이름표를 붙인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나는 지금 모든 게 지긋지긋하다. 이렇게 지긋지긋하다고 쓰고 있는 내 자신마저 지긋지긋하다.
분명히 내게도 기분을 소리 내어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말하지 않는다. 왜 말하지 않게 되었는지는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다. 말하지 않음으로서 나는 느끼지 않게 되었고 무언가를 느끼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고 또 찾았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서도 만족하지 못했다. 분명 나는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데 모두들 내가 모든 것을 가졌다고 했다. 아마도 나는 내가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에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원한다.
배부른 소리라는 주변의 말들이 너무나 증오스럽다. 나는 이미 많이 가졌으니 내 불만은 배부른 자의 헛소리가 되고 사치가 되어 내게 돌아온다.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는다. 나는 사랑받고 있지만 애정에 허덕이고 남들에 비해 풍족하지만 여전히 빈곤하다.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배부른 소리라는 그들의 말에 동의해 버린다. 내 스스로 나의 입을 틀어막는다. 그래서 나는 쓴다. 외칠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내보일 수 없기에 쓴다. 그저 쓴다.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대상에 대해 갈구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너희들이 보기에 나의 고통은 행복에 겨운 것이고 하잘 것 없어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것 역시도 고통이다. 내 고통을 너희들이 대신 살아주지도 않을 거면서 나의 고통을 경시하지 마라. 나는 숨이 막힌다. 숨이 막혀 허덕이고 있는데 남들보다 나으니 참으라는 말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 고통이 너희의 것보다 작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는가.
A는 거기까지 쓰고 연필을 내려놓았다. 처음의 정갈했던 글씨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거칠어지고 흐트러져 있었다. 숨을 몰아쉬며 A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자신은 틀린 말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자신이 한 말이 틀렸다는 사실 역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A는 다시 연필을 들었다. 이제는 자기 손으로 자신을 깨부숴야 할 때였다. 그러나. 세 글자를 다시 적었다. 그러나, 나는 배워왔다.
그러나 나는 배워왔다. 내가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고 배워왔다. 가슴은 피를 토하며 힘들다고 울부짖어도 머리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안다는 것은 내게는 고통이다. 내 맘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쇠사슬이 배움이다. 머리와 가슴은 멀어진다. 나를 질책하기만 하고 차갑고 냉정하게 판단하기만 하는 것은 머리고 이성이다. 사회 역시 그 잣대로 나를 판단한다. 나는 이 쇠사슬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완벽하게 혼자가 되어 이 세상에 나 홀로 남기 전까지 나는 머리의 지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말하지 못하고 쓸 뿐이다. 울지 못하고 그저 무감각해질 뿐이다.
내가 가지지 않았더라면 배움과 세상은 내 고통을 연민했을까. 마음대로 목 놓아 울어도 됐을까. 그런 것이 소유의 대가라면 없어도 좋다. 하지만 나는 내 소유를 버릴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이 풍족함 속에서 태어나 자랐고 가진 상태로 태어났다. 내게 있어 소유란 나 자신이다. 나는 나 자신을 버리지 못한다.
뚝. 연필심이 부러졌다. A는 연필을 내던졌다. 실타래를 풀어내 보았지만 남은 것은 조각난 실의 잔해들뿐이었다. 손 안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